[윤기자의 View-人(2)] 목공예 40년의 장인 송암 이상도 선생님 인터뷰
인천은 예전부터 서울을 향한 관문의 역할을 해왔다. 70년대에는 국가적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산업구조도 바뀌며 서울로 많은 사람들이 집중되면서, 인천에는 목재수입과 가공에 관련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유명 가구메이커들 모두가 인천에서 시작되어 큰 기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채산성이 맞지않아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여 목재와 가구로서의 명성이 퇴색된 것 같았으나, 아직도 인천 곳곳에는 오랜 경력의 장인들이 남아 소리소문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은 40년동안 입체목공예의 외길을 걸오온 송암 이상도 선생님을 만났다.
윤준식 기자(이하 윤기자): 40년간 목공예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송암 이상도 선생(이하 송암): 내가 호적은 50년생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46년생이야. 옛날에는 도민증이라고 있었는데, 동해에서 태어나서 어릴 적에 파주로 이사오면서 처리가 잘 안되었나봐. 이제 내일모레 70되는거지.
윤기자: 40년 넘는 경력이시라고 해서 연세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목공예를 하신거군요.송암: 68년도에 아랑공예사라는 곳에 들어가면서 시작했지. 나는 호적이 늦어져서 나이가 좀 들어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엔 어렵던 시절이라 공장에 보면 시골에서 올라온 13살 어린 애들도 있었어. 그런 애들에 비하면 6~7년 늦게 시작한거지.
윤기자: 보통 이런 일(목공예)들은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게 되잖아요. 그럼 당시에 굉장히 늦게 시작한 셈인데, 이렇게 장인의 외길을 오시게된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송암: 내가 좀 재주가 좋았어. 이런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 일을 배우는 단계가 있어요. 목재를 깍는 단계까지 오려면 2년 정도 허드렛일을 하며 배워야 하는데 난 2주만에 깎는 걸 시작했지. 그리고 2년 있다가 기능올림픽에 나가게 된 거예요.
윤기자: 그렇다면 원래 목공예 쪽으로 타고나신 거군요. 요즘은 진로적성검사와 특기적성교육이 이루어지지만, 당시엔 그런게 없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 길로 들어오시게 된건가요송암: 한 16살 때던가 내가 재주가 좋았어요. 장난감 같은걸 직접 만들었지. 찦차 같은 것도 그냥 만든게 아니라 바퀴도 달고 핸들도 달아서 타고다닐 정도로 만들었었어. 근데 그때 농촌발전을 위해 4H활동이 있었어요, 새마을운동 비슷한 거. 거기서 발명품 공모전을 했는데 그게 계기가 된거지. 시골에는 재래식 변소잖아 그걸 개량해서 사람이 올라가면 문이 열리고 닫히게...... 그걸 보고 친구가 직장을 소개한 거예요.
윤기자: 지금은 “나들목 공예”라는 이름의 공방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이름이 예스럽지 않네요 보통 선생님 연배면 “OO사”, “OO업”이런 딱딱한 간판을 거는데 말이죠.송암: 기능올림픽 수상 후 몇 년 지나 70년대 중반부터 독립해서 일을 했어요. 당시엔 목공예품 수출이 잘 되던 때라 할만 했지. 국내는 별로 판매가 안되었어. 경제수준이 높지않으니까 공예품 인식이 없었어. 주로 일본으로 많이 수출했지. “나들목공예”란 이름은 나무의 모양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게 있어서 붙였어요. 딱딱한 이름, 예술적인 이름 그런거 보담. 부르기도 쉽고 ‘고속도로 나들목’ 이런 거도 있어서 기억하기 쉽고 생각하기 쉽고 그럴 것 같아서. ‘송암’이라는 호도 내가 직접 지었어. 소나무나 바위처럼 초심을 잃지 말자고.
윤기자:: 흔하게 마주치는 목공예품이라면 나무그릇이 생각나는데 그런건 분야가 다르죠 송암 선생님은 주로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송암: 목기는 로꼬르라고 해서 기계로 파내는 거고, 목공예는 거의 다 거의다 수작업이야. 보통 목공예에는 가구에 붙이는 부조나 판화가 많은데, 나는 입체조각을 했어요. 예전에 보면 응접실 테이블에 호랑이, 독수리 이런 조각 있어요. 이렇게 손으로 다 깎는게 내가 하는 일이야. 형태를 만드는 일이니까 배우기도 쉽지않고 힘들지. 가구에 붙이는 부조나 판화는 오려내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 일은 손기술 말고도 상상력이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입체조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윤기자: 그럼 입체조각하신 것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없으신가요송암: 84년도에 여수에서 거북선 복원사업을 했는데 거북 머리와 귀면 조각을 내가 했어요. 1미터 30정도 크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도 입체하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서 내가 작업해서 여수로 보냈지.
윤기자: 거북선 복원사업으로 유명세 치르신건 아닌가요 그 인연으로 지금도 거북선 조각을 많이 하시는건지요송암: 당시 여러 사람의 작업이라 대표적인 사람 이름만 올라가고 내 이름이 올라가진 않았어. 그래도 거북선 복원작업은 뿌듯하고 추억에 많이 남아. 나중에 휴가로 여수에 가서 거북선을 보는데 뭉클하더라고. 거북선 조각을 많이 하는 것은 좀 다른 이유인데, 여기저기 거북선 나온 게 많지만 비율도 다르고 정교한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실물에 가깝게 만들어서 알리고 싶었지.
윤기자: 호랑이나 독수리, 용 조각을 많이 한 이유가 있으신건지송암: 호랑이 들어간 거는 일본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옛날에 호랑이는 전부 일본수출이야. 호랑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좋아했어요. 용맹성이 있어 잡귀가 안들어온다고 생각했지. 7,80년대 독수리, 용, 호랑이 조각은 모두 수출품목이었어요. 호랑이는 2톤 타이탄에 적재해서 수출한 적이 있었어. 일본 무슨 호텔에 장식용으로 들어간다고 했던가 당시엔 요즘처럼 장비가 없어서 사람이 다 해야 했어. 나도 그러다 손톱 빠지고 고생 많이 했죠.
윤기자: 대단한 작업이네요. 지금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데 기록으로 남기거나 해서 기술을 전수할 수는 없는건가요송암: 이 일은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이 가르쳐주는 거지. 다만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빨리 배울 뿐인거죠. 이걸 어떻게 해야한다는 매뉴얼 그런거 없어요. 주문제작하는 사람들도 도면으로 표현 못하는 경우도 있어. 크기만 말해주면 알아서 해주는 쪽이야. 우리도 내부 서류나 매뉴얼은 없어. 디자인회사 같은 데서도 의뢰가 많이 오는데 우리보고 오히려 도면을 달라 해. 그러니까 후진양성이 시급한거에요.
윤기자: 그럼, 정부지원이나 이런 것을 통해 제도적으로 후진양성을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송암: 정부 측에는 서류작업하기 애매한 게 많아서 요청하지 못하고 있어요. 공예에 대해 지원하는게 별로 없는 것도 있어. 우리같은 사람들이 서류작업에 약한 것도 있지만, 서류로 만들 수 없는 것이 더 많아. 전에 관광협회에서 설문조사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공예하는 사람들이 나이가 많고 맥도 끊어진다 해요. 배울 사람이 없대. 저기 통영에서 나전칠기하는 사람이 나하고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고. 지금 입체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옛날에 하던 사람들도 전업하고 없어. 일감이 들어와도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거야. 배우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윤기자: 심각한 일이네요. 공예 쪽에 계시는 분들의 움직임이 있을 것 같은데요송암: 2009년도에 인천지역에서 공예조합을 설립했어요. 공예단지를 만들어보자고. 민속마을처럼 꾸며서 사람들이 찾게 해서 인식을 넓히자는 거죠. 한지, 비두, 닥종이, 목공예 등을 한 자리에 모아서 상품도 팔고 체험도 하게 해서 저변이 넓어지면 이 일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만으로는 어려워요.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도 어렵네. 인천 아시안게임 앞두고 관광지로 개발해도 좋을텐데.
윤기자: 이제 은퇴하실 때도 되었는데 앞으로 계획은 어떠신가요송암: 이거는 정년퇴직이 없어요. 손만 움직일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야. 앞으로도 후진양성도 해야하고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할 예정입니다.
윤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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