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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보기드문 옴니버스 수작 - 정인봉 감독의 영화

윤준식 기자 승인 2017.05.15 18:22 의견 0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가 주목한 옴니버스 장편영화 <길>.

 

김혜자, 송재호, 허진 등 선생님이라 부르는 베테랑 배우들이 대거 주연으로 출연해 시선을 끌어당겼다. 작품선택에 까다롭다는 배우 김혜자는 1999년 <마요네즈> 이후 10년만인 2009년 <마더>, 2014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 출연한 바 있는데, 그 다음으로 선택한 작품이 바로 영화 <길>이다.그러나 배우 김혜자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단편영화 <순애>에도 출연한 것으로 나온다. <순애>는 독립단편이면서 영화 <길>의 첫 번째 옴니버스이기도 하다.

 

여러 옴니버스를 장편화했다는 점에서 감독 자신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장편을 4편의 단편영화로 구성해 독립영화의 어려운 제작여건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오랜 제작부 경력을 가진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길>은 김혜자 주연의 <순애의 하루는 길다>, 송재호 주연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상범의 첫사랑>, 허진 주연 <수미의 길>의 순서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이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단편 <청춘>이 영화와 영화 사이에 삽입되며 다리 역할을 해준다. 세 편의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지만 단편 <청춘>이 있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묶어준다.

 

3편의 옴니버스 단편을 연결해주는 또다른 단편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등장한 인물 순애, 상범, 수미의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p class=(제작사 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309" /> 3편의 옴니버스 단편을 연결해주는 또다른 단편 <청춘>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등장한 인물 순애, 상범, 수미의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제작사 블루블랙 제공)

 

리드미컬한 유머가 돋보이는 <순애의 하루는 길다>

“늙으면 쓸데없어지는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렵거든요”

 

홀로 부유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순애(김혜자 분). 생일을 맞았지만 외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전제품 수리를 위해 AS기사들이 차례로 방문하고, 마침 생일을 맞이한 냉장고 수리기사(온주완 분)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 위한 순애 씨의 음모()의 일부일 뿐.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며 가전제품을 하나씩 고장내며 AS기사의 방문을 신청한다. 달력에는 AS 기사 방문일정이 빼곡히 적혀있고, 순애 씨는 파티라도 가는 듯 옷이며 화장이며 부산한 하루를 보낸다.

 

생일을 맞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순애는 귀여운 음모<p class=()를 꾸민다. (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36" /> 생일을 맞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순애는 자기만의 귀여운 음모()를 꾸민다. (블루블랙 제공)

 

이 에피소드는 배우 김혜자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단편이다. 김혜자만의 만년소녀의 이미지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무거운 주제를 김혜자 특유의 꿈꾸는 듯한 눈빛과 미소로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다. AS기사를 위해 상차림을 할 때의 빙글빙글 춤추는 스텝과 립스틱을 짙게 바르는 장면은 작품을 감상하고도 두고두고 떠오른다.

 

또한 이 작품 속에서는 현 시대 젊은이들이 처한 노동의 현실도 직시한다. 매뉴얼화된 지침을 따라야 하는 서비스 노동자의 현실, 왜 바쁜지 알 수는 없지만 가족과 단절되어가는 생활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가족의 의미는 사라지고, 가족 아닌 존재에게 가족같은 관계를 요구하는 시대상을 고발한다.

 

냉장고 수리기사<p class=(온주완 분)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커피와 케익도 먹는 순애 (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30" /> 냉장고 수리기사(온주완 분)와 즐겁게 식사를하고 커피와 케익도 먹는 순애 (블루블랙 제공)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상범의 첫사랑>

“참으로 오래 걸어왔는데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아”

 

영화 <길>의 메인 테마격인 에피소드로 단편 <청춘>과 호응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배우 송재호 특유의 담담한 표정연기만으로도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60년 세월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청기를 껴야 할 정도로 노쇄한 상범. 하나뿐인 손녀를 위해 베이커리카페를 창업하고 첫사랑 순애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를 만난다. <p class=(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309" /> 보청기를 껴야 할 정도로 노쇄한 상범. 하나뿐인 손녀를 위해 베이커리카페를 창업하고 첫사랑 순애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를 만난다. (블루블랙 제공)

 

노년에 베이커리 카페를 창업한 상범(송재호 분). 상범의 오픈준비를 돕기 위해 2주간 파견된 제빵 코디네이터(지안 분)가 상범의 눈을 사로잡는다. 첫사랑 순애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옛날 사진을 꺼내게 되었았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뜻을 따르다보니 첫사랑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중매로 결혼했고, 막막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월남전에 자원해 참전했다. 전쟁에서 돌아와보니 딸을 남긴 채, 아내는 자신의 목숨값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어미없이 자라며 삐뚤어진 딸은 손녀를 맡긴 채 자신의 삶을 위해 집을 떠나버렸다. 지금까지 손녀를 키우며 열심히 살아온 상범은 자신에게도 청춘이 있었음을 회상하며 앞으로도 이어질 삶의 길을 바라본다.

 

삶을 위해 달려온 인생의 끝자락에서 첫사랑 순애를 다시 떠올리며, 새로운 인생의 길을 내딛는 상범. <p class=(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30" /> 삶을 위해 달려온 인생의 끝자락에서 첫사랑 순애를 다시 떠올리며, 새로운 인생의 길을 내딛는 상범. (블루블랙 제공)

 

절제된 대사 탓에 배우 송재호의 눈빛연기와 표정연기가 두드러지는 에피소드다. 여기에 코디네이터 역의 지안의 연기가 가세해 정적인 화면에 생동감이 넘쳐나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송재호 배우의 독백(나레이션)은 모든 관객의 가슴 속에 저며 들어간다. 이런 송재호 배우의 존재감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재건,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하며 격변의 세월을 겪어온 70~80대 실버세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해 준다.

 

평생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온 억척어멈 수미. 아들을 잃은 상실감의 무게가 죽음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데... <p class=(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30" /> 평생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온 억척어멈 수미. 아들을 잃은 상실감의 무게가 죽음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데... (블루블랙 제공)

 

위대한 엄마를 발견해가는 로드무비 <수미의 길>

“엄마는 너 때문에 살아야 될 이유고,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찬사야”

 

옴니버스 중 가장 무거운 주제의 에피소드이면서 대단원을 이루는 치유의 에피소드다. 허진 배우의 선 굵은 연기는 짧은 시간 동안 수미의 시선을 쫓으며 상실과 소통, 깊은 상처의 극복이라는 감정의 동화를 경험하게 한다.

 

식당을 운영하며 아들 하나 건사한 수미(허진 분). 수척해진 몸과 깊은 주름은 그간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몸이 아픈 자신을 만나러왔다 비명에 떠나버린 아들로 인해 깊은 우울을 헤어나지 못한다.아들을 따라 나선 마지막 여행길. 수미는 자신의 영정사진을 촬영하고 수면제를 지닌 채 직행버스를 타고 떠난다. 추억의 음악을 LP로 틀어주는 어느 주점에 들른 수미. 전과 막걸리를 시켜 목을 축이는데, 말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두 젊은이를 목격한다. 이들과의 동행 속에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찾은 수미. 이들의 목적이 자신과 같음을 눈치 채고 두 젊은이에게 다시 살아가자고 말하며 이들을 끌어안는다.

 

"화장을 부탁할게" 며느리에게 유서를 부치고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수미. <p class=(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45" /> "화장을 부탁할게" 며느리에게 유서를 부치고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수미. (블루블랙 제공)

 

한국현대사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면은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온 엄마의 일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존여비의 세계관은 여성의 사회진출과 사회적 성공을 막았고, 아들의 입신양명이 여성의 성공으로 동일시되는 면이 많았다. 잘난 아들의 죽음은 고독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우울감과 상실감은 사는 고통보다 죽음이 줄 고통의 단절을 선택하고 싶게 한다. 극중 수미는 한 아들의 엄마가 아닌 모든 자녀들의 엄마가 됨으로 자신을 되찾으며 삶의 끈을 이어감으로 ‘엄마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허진 배우의 눈물연기는 수미의 감정기복을 극명한 명암으로 그려내며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허무한 시선이 생기어린 시선으로 변화하며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삶의 찬가를 부르고 싶게 만든다.

 

 

세대 간 소통을 찾는 영화 <길>

 

이렇게 각 에피소드 속의 세 주인공은 각자의 삶에 주어진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과거에는 함께 한 길을 걸어왔던 이들이다. 삶의 우여곡절이 이들을 갈라놓았지만 걸어왔던 길었고 함께 살아온 인생이었던 것이다.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며 한국사회의 세대갈등이 심각해지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영화는 아직도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세 주인공을 통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담론을 찾아가고자 노력한다. 모든 에피소드들이 세대간 소통부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소통에 장애가 되던 문제점인 마음의 벽을 허무는 노력을 보이고자 노력한다. 서툴어도 마음이 담긴 한 마디 말, 작은 행동을 해봄으로 갈등의 해소를 시도함으로써 갈등의 극복을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뛰어난 영상미는 스크린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을 만큼 마음의 휴식과 행복함을 전해준다. 다소 느린 템포로 전환되는 장면과 밝고 잔잔한 화면은 지금은 없어져버린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재현한다. 그러다보니 현란한 시각효과와 종합편집에 지친 눈을 쉬어가게 하면서도 영화가 보여주는 풍광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게 한다.

 

다만 여러 단편을 하나로 묶는 옴니버스 작업이었던 만큼, 약간은 억지스런 설정도 없진 않다. 자매로 설정된 청춘기의 순애와 수미는 노년의 순애, 수미와는 많이 다르다. 노년기에 함께 찍은 사진도 등장하지 않고, 순애의 생일날도 순애와 수미는 통화조차 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수미의 길>에 등장하는 수미는 중간중간 걸죽한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청춘기의 수미는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어 어색함도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단점으로 영화 <길>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앞서 스포일러에 준하도록 영화전반의 내용을 소개하며 오목조목 작품성의 면모를 드러낸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장편 독립영화의 상업화에 신기원을 이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여러 편의 단편영화를 연속 제작함으로 인해 여건에 맞는 제작을 단계적을 해갈 수 있다는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다. 단편영화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실험성과 영상미학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청춘이었던 때가 있었다. 순수했던 청춘기는 세대를 넘어선 공감대이기도 하다. <p class=(블루블랙 제공)" width="550" height="230" /> 누구나 청춘이었던 때가 있었다. 순수했던 청춘기는 세대를 넘어선 공감대이기도 하다. (블루블랙 제공)

 

상업영화를 표방하는 독립영화 전성시대가 오길

 

한편, 영화 <길>을 감상할 수 있는 극장이 너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일부 예술영화 상영관에서만 절찬 상영될 뿐, 가까운 멀티플렉스에서 관람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개봉관을 잡기 어려운 영화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예술영화, 다양성영화라는 라벨을 붙여 특정 상영관으로 몰린 영화들도 상업영화를 목표로 만든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멀티플렉스와 맥을 함께하는 투자회사의 자본을 받지 않은 영화들이 철저히 외면받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한국영화 전성시대가 온 듯하지만 100만 관객을 끌어모을 캐스팅, 전형적이고 선정적인 스토리, 현란한 영상미를 내세워야 자본투자가 이뤄지는 구조가 굳어가고 있다. 아예 100만이 들어와도 적자보는 게 지금의 영화판이다. 그러다보니 마케팅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순제작비를 능가하는 제작투자가 없이는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자금 회수를 위해 멀티플렉스는 잘 나갈만한 영화를 틀어대느라 멀티플렉스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거실보다 조금 더 큰 극장에서 손바닥만한 화면을 들여다보며 팝콘을 먹는게 고작이다. 아마 70미리 대형스크린으로 영화를 즐긴 세대라면 이 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악순환의 고리의 머리는 꼬리를 잡아삼켜 가며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홍콩영화가 순식간에 몰락했듯 한국영화도 그런 절망에 빠질까봐 두렵다.

 

영화 <길>과 같은 상업적 독립영화들이 약진하며 작은 승리를 쟁취해나가길 소망한다. 영화를, 한국영화를 사랑하기에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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