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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창조기업 특집(7)] 일상 아이디어에서 히트상품을 만드는 지식기반 1인창조기업

윤준식 기자 승인 2013.10.23 10:03 의견 0

100개의 특허를 가진 발명가, 하이피아테크놀로지 정재구 대표

 

 

 

일상 아이디어에서 히트상품을 만드는지식기반 1인창조기업100개의 특허를 가진 발명가,

 

하이피아테크놀로지 정재구 대표

 


시사미디어투데이는 “창조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1인창조기업'들의 활성화라는 나비효과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까 주목하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발명과 특허로 무장한 지식기업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100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하이피아테크놀로지 정재구 대표'의 발명 일대기와 함께 생활 속의 아이디어어로 시작하는 지식 비즈니스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고자 한다. 특별히 40년이 넘는 발명인생을 조명하는 차원에서 자서전 형태의 기사로 재구성했다.

 

1968년도 1회 발명의 날, 나의 발명인생이 시작된 날이다.원래 나는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다. 1968년 1회 발명의 날을 기념해서 시행했던 발명대회에 아이디어를 내었는데 그게 1등 당선을 했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10년에 한 번씩 히트제품이 되는 발명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발명 이야기68년도만 해도 옷걸이가 없어서 벽에 못을 박고 거기에 옷을 걸곤 했다. 옷걸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정 때부터 사용되던 어깨모양 옷걸이가 있었지만 사용에 불편했다.요즘엔 옷걸이에 바지를 걸 수 있도록 집게가 달려나온 것도 있는데, 당시에 집게를 생각할 수 없어서 바지를 걸 수 있는 골걸이가 움직이도록 고안한 옷걸이를 발명했던 것이다. 그게 국민생활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1등을 수상했다. 아마 국가가 로열티 보장을 해줬으면 그것만으로도 재벌이 되었을 거다.10년 후 여행용 칫솔 발명, 10년 주기로 히트작 탄생그 이후로 꾸준히 발명을 했다. 옷걸이 발명으로부터 10년 정도 지나 여행용 칫솔을 발명하게 되었다.칫솔은 1자로 된 것만 있다는 상식을 깨고 ‘분질러 사용하는 칫솔’이라는 아이디어로 지금은 흔하게 된 여행용 칫솔이 나오게 되었다. 이후 발명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며서 예술계를 떠나 산업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 하이피아테크놀로지 정재구 대표. 100건 이상의 특허를 갖고 있는 발명가이다 ⓒ 윤준식 기자

 

히트상품 제조기가 되다

 

90년대에는 철망에 합성수지를 인젝션하는 발명으로 특허를 냈다.철망에 합성수지를 인젝션하는 것은 당시에 획기적이었다. 에어콘,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설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공기구멍을 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막으려면 철망을 써야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합성수지를 코팅한다는 것은 제품디자인과 내구성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었다. 삼성전자, 대우전자 할 것 없이 내가 일하던 회사의 제품을 받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당시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이 제품을 제조한 업체들은 상당히 큰 돈을 벌어들였다. 나중에 새마을금고를 2개나 소유하게 된 사장도 생겼다고 들었다. 나도 특허 로열티로만 300만원씩 10년간 받았고 더욱 많은 발명으로 제품 개발에 이바지했다.생활용품 중 망이 들어간 것 중 내 아이디어가 들어간 것이 많다. 조리, 체, 주로 주방용품을 통해 보급되었다. 발명이라 하면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고 축음기를 만든 것만 생각하니 잘 못느끼지만 생활 영역에 이렇게 파고드는 발명이 빅히트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에서 착안한 발명이 대박을 쳤지만...90년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데 슬리퍼를 갈아 신고 들낙거리는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불편함을 해소하자는 생각에 골마루로 된 깔판을 개발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합성수지로 제품화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서 특허를 내서 개인사업을 했다. 이 제품은 다량의 유사품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엄청 잘 되었다.경기도 고양시와 성남시에 일산, 분당 아파트가 터지면서 이 제품의 수요가 폭발했다. 건설회사에서 아파트마다 골마루 깔판을 놓았던 것이다. 당시에 결제받을 어음과 수표를 한웅큼 쥐어야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불어닥친 IMF에 내가 쥐고 있던 것이 모두 부도수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표를 딱 쥐니까 정신이 몽롱해졌다.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다. IMF 충격으로 난생 처음 링거를 맞은 것이었다.

 

 

병실에서도 이어지는 발명 아이디어, 회생의 시작

 

한 일주일 입원하며 몸을 추스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매일 링거를 맞다보니 링거의 수액조절기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의사가 회진을 하며 간호사에게 한 시간 반 주사를 놓으라 처방했는데 간호사가 처방에 정확히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병실에 누워있으면서 수액조절의 어려운 과정을 개선할 수 있는 발명을 구상했다.시제품화를 마치고 나자 중소기업청에서 전시회에 출품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결과 그 해가 가기 전 미국 로스앤젤레서의 다국적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세계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큰 회사라는 것이었다.이 회사가 2차대전 당시 야전병원의 수액조절기를 디자인하여 대박을 친 회사였다고 한다. 이후로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액조절기와 관련한 발명이 많이 있었지만, 시간 개념을 넣어 실용화된 수액조절기는 없었다고 한다. 시간개념을 넣게 되니 정밀기계의 형태가 되어 가격 때문에 소모품처럼 쓰기는 어려웠던 것이다.이런 자신감을 얻으며 15년의 와신상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제는 어느 정도 운신할 수 있게 사업이 회복되었다.

 

 

신발 제조로 유명한 부산에 기초한 발명으로 재기

 

이후 부산대학 창업BI센터에 들어가며 부산대학의 교수진들과 함께 부산과 관련된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부산은 예전부터 신발제조로 유명하여 그와 관련한 연구를 많이 했다. 휴대용 신발건조기, 자동개폐신발, 에어펌핑 등의 발명을 진행했다. 흔히 ‘워카’라 부르는 전투화 건조기술은 연구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상품화에서 좌절되었다.상품화에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대학과의 공동연구 과정에서 학술적인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의학적인 분야의 실험을 병행할 수 있었다.원래 골마루 깔판을 개발할 때부터 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많이 했었다. 지압 깔판도 상품화해서 일본 수출도 했기 때문이다. IMF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터전을 앗아갔다. 부산의 신발업체도 줄도산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내가 부산에 기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 관련한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 부산의 산업인 신발에포커스를 맞추다. 이제 걸으면 건강해진다.레이저를 활용해 발의 경혈을 자극하는 기능성 신발을 보이는 정재구 대표. ⓒ 윤준식 기자

 

레이져 치료기법이 들어간 기능성 신발 연구

 

지금 만들고 있는 레이져 신발은 물건이다.신을 신은 사람이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 속에 불이 들어오며 발 안의 경혈을 찍어준다. 이것을 통해 퇴행성 관절염, 허리통증, 냉대하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치료효과를 줄 수 있다. 걷기만 하면 낫는 것이다. 이미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과 함께 퇴행성 관절렴에 대한 동물실험은 마친 상태이다.신발 개발이 끝나면 안경에도 응용해볼 생각이다. 요즘 이어폰 사용자가 많아서 두통과 이명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든지 노화가 진행되며 60 전후에 이명을 느낀다. 이명 치료를 위한 레이져 치료기기가 나와있는데 더욱 실용적인 발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명인생은 끝이 없다

 

내가 보유한 특허만도 100여개다. 41년생으로 노년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발명을 한다. 발명에는 나이가 없다.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발명의 소재들이 많이 있다. 호기심과 창의력만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 발명을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계속할 것이다.

 

 

(이번 취재는 중소기업청 지정 1인창조기업 BI인 (주)크로스비즈의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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