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브레히트 극이 한국의 색깔을 입다 - 연극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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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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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브레히트는 익숙한 인물이다. 브레히트는 기존의 연극이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구조로 이루어진 이야기 방식으로 되었던 데 반발해 에피소드의 제시를 통해 관람자 스스로가 극적 진실을 판단하도록 하는 ‘서사극 기법’을 자리잡게 한 인물이다.
이런 브레히트의 극이 한국의 음과 선을 만나 새롭게 탄생했다. 2006년 이후 11년만의 재공연으로 돌아온 연희단거리패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이다. 1941년 취리히에서 발표된 원작의 주무대는 프로이센 ‘30년 전쟁’이지만, 이윤택은 6.25전쟁으로 옮겨와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배경으로 바꾸어 무대에 올렸다.
연극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커튼콜 (사진 : 김혜령 기자)
전쟁터에서 포장마차를 몰고 다니며 잡동사니를 판매하며 먹고 사는 여성 ‘억척이네’는 서로 성이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이 있다. 용맹한 첫째는 모병꾼의 꾐에 넘어가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민가를 침략해 습격하면서 식량을 구해오고, 그러면서 훈장도 받고 승진하게 되지만 결국 같은 행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 한다. 둘째 아들은 정직하고 솔직해 군대에서 출납부를 관리하지만, 그 정직함으로 인해 금고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벙어리 막내는 지리산에 남아있는 북한군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북을 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둘째와 셋째의 죽음은 보았지만 첫째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억척이네’는 첫째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으며 다시 전쟁터로 포장마차를 끌고 나간다.
이 연극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편한 ‘권선징악’의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주인공은 전쟁을 통해 사업을 번창시켜 먹고 살 궁리를 한다. 목사는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전쟁 중에도 평화가 있다고 궤변을 쏟아놓다가도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사제복을 꺼내 입고 기도를 드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큰 아들은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구해오는 행위로 승진을 했지만 후에 같은 행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을 인지하는 관객들의 사고는 변화한다. 이렇게 관객은 극으로부터 분리되며 극에 대해 차갑게 생각하게 해 브레히트 극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배우들의 대사는 운율을 더해 판소리 한마당으로 재구성했으며 무대의 음악 모두 배우들의 라이브 연주로 이루어져 관객들이 극에 집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브레히트 원작의 극이지만 한국적 음악과 춤이 들어간다고 해서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1950년대 한국전쟁의 아픔을 극대화시키는 역할로 작용했다.
여기에 ‘억척이네’를 맡은 김미숙 배우의 연기는 관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른 ‘억척이네’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1950년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가 치열했던 우리네 엄마들을 생각하게 했다.
연극의 원작자인 브레히트. 현대 연극계에 많은영향을 미치고있다. (Bundesarchiv, Bild 183-W0409-300 / Kolbe, Jorg / CC-BY-SA 3.0 제공)
물론 브레히트의 원작극과는 다른 요소들도 곳곳에 눈에 띈다. 둘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서 원작의 경우는 어머니의 소리없는 오열을 표현해낸다. 그러나 연희단거리패의 억척어멈은 우는 소리를 내다못해 무대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이는 우리네 정서를 반영한 이윤택식의 표현이었다. 사람이 죽고 나서 곡을 하는 우리의 문화는 적극적인 표현을 통해 슬픔을 승화시킨다. 이처럼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바뀐 브레히트의 극은 원작과 유사하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후 ‘서푼짜리 오페라’, ‘원전유서’ 등 브레히트의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새롭게 해석된 브레히트가 우리에게 또 어떤 얼굴로 찾아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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