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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5)] 그냥 갈 수 없잖아 (1)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1.19 10:08 의견 0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한테 술을 배운 나는 친구들과 진작부터 집에서는 마셨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선 아버지도 뭐라 하질 않았다. 물론 고3 여름방학 때부터 돈암동으로 진출하면서 친구들과 술집에서 어울리기도 했지만 어른과 술집에서 마셔보긴 이날이 처음이었다.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이었다. 외삼촌은 좋아하는 큰 조카가 대학에 떡 하니 합격을 했으니 축하주를 사겠다고 나가자고 하셨다. 마침 그날은 외삼촌도 그냥 넘기기엔 서운할 좋은 일이 생긴 날이기도 했다. 딸 하나를 키우던 외삼촌이 드디어 득남을 한 날이었다.

 

“정환아, 삼촌이랑 나가자. 한잔 사주마. 조카가 대학생이 됐는데 외삼촌이 축하해 줘야지.”

 

그 당시 지금의 롯데백화점 뒤편에 포장마차 촌이 있었는데 약 십여 개의 포장마차가 쭉 줄을 서있었다. 나는 오가며 구경만 했지 까까머리를 한 학생신분으로 감히 아저씨들 틈바구니에서 술을 마실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다. 그 근처를 지나갈 때면 꼼장어 굽는 냄새가 어찌나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지 ‘대학에 가면 포장마차부터 가보리라’, 마음을 먹을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이야기다.

 

당시에는 천오백원이면 병어회 한 접시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소주는 오백원이었다. 는 최고의 포장마차였다. <p class=(사진 : 이정환)" width="550" height="367" /> 당시에는 천오백원이면 병어회 한 접시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소주는 오백원이었다. <그냥갈수없잖아>는 최고의 포장마차였다. (사진 : 이정환)

 

“정환아 이 집을 단골로 해라. 다른 덴 가지 말고.”

 

포장마차를 들어서며 외삼촌이 한 마디 던졌다. 포장마차에 붉은 페인트 글씨로 큼직하게 <그냥갈수없잖아>라고 쓰여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주인아줌마한테 “아줌마 앞으로 이놈이 오면 무조건 내 앞에 달아 놓고 외상으로 술 주쇼잉” 하고 인사를 건넨다.

 

“잘 생겼네. 누구야” 아줌마가 외삼촌한테 말을 편하게 하는 걸 보니 오랜 단골인가 보다.

 

“네, 이번에 대학생이 된 내 조카요. 큰 누님 아들이죠. 이번에 외대에 합격했어요.”

 

싱글벙글 거리며 나보다 외삼촌이 더 신나서 말을 잇는다.

 

“정환아, 뭐 먹을까 안주 골라봐라. 이 집 안주는 다 맛있다.”나는 주저하지 않고 꼼장어부터 주문을 했다.

 

처음 맛본 꼼장어구이는 천하별미였다.

 

“아줌마, 나 아들 낳았소.” 외삼촌의 말에 아줌마는 축하한다며“안주 하나 서비스로 줄 테니 골라 봐. 오늘은 병어가 물이 좋은데 병어회나 한 접시 줄까” 라며 말을 잇는다.

 

“다들 기술이 좋네. 나는 다섯을 낳았어도 다들 조개들뿐인데.”

 

아줌마의 말에 포장마차 손님들이 배꼽을 잡는다. 아줌마가 딸부자라서 짓궂은 손님들은 아줌마를 장모님이라 부르곤 했다. 가끔은 딸들이 나와서 밤늦게 연탄가스를 마시며 고생하는 엄마를 돕곤 했는데 딸들이 꽤나 미인 형이었다.

 

<그냥갈수없잖아>는 단골손님이 많았다. 멀리 의정부에서부터 술을 마시러 올 정도였다. 옆으로 십여 집 이상 포장마차가 줄 서있는데도 늘 이 집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이 집만의 특색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술이 센 손님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1인당 소주 한 병만 판다. 간혹 처음 와서 그런 룰을 모르고 ‘소주 한 병 추가’를 외쳤다간 아줌마의 심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게 불만이어서 시비라도 걸라치면 옆자리에 있던 단골손님들이 가만히 두질 않았다.

 

대학에 들어간 뒤 나도 이 집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물론 외삼촌과도 자주 들렀지만 친구들이나 선배들과도 들락거리게 됐다. 미팅을 해서 여자친구가 생기면 <그냥갈수없잖아>에 데려와서 인사를 시켜주곤 했다. 아줌마는 기억력이 좋아서 한 번 데리고 간 여자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분별을 하며 한 번도 실수를 안 했다. 고마웠다. 흐흐.

 

군대 가기 전까지 깊게 사귀었던 첫사랑 정화와의 러브스토리도 <그냥 갈 수 없잖아>가 주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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