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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4)] 경복궁의 수난(上)

시사-N 승인 2018.02.02 10:35 의견 0
조선왕조 초기부터 시작된 경복궁의 수난

 

경복궁은 완공 직후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태종 임금이 경복궁에서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죄책감 때문에 경복궁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오히려 태종은 다른 궁궐인 창덕궁을 지어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세종대왕 때 정치가 안정을 찾으면서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시작하지만, 이후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겪으며 모두 불타 없어져 270년의 긴 세월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궁궐의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또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경복궁을 오랜 세월 방치하게 됩니다.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p class=(사진출처 : Hulbert, Homer B. 위키피디아)" width="408" height="550" />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사진출처 : Hulbert, Homer B. 위키피디아)

 

그런데 조선 말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사는 1865년에 시작해 1868년에 마쳤는데, 짧은 기간 동안의 무리한 공사와 공사 중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다시 지어야하는 통에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고통이 커집니다. ‘경복궁 타령’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져 유행할 만큼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습니다.

 

경복궁, 복원의 역사

 

경복궁 탐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망가진 상태로 270년 동안 방치되어있던 경복궁을 짓는 사업은 당시 사회의 큰 이슈였습니다.

 

조선의 정궁을 복원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에 건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실시했습니다. 원납전이란 경복궁을 짓는데 필요한 돈을 기부금의 형태로 받은 제도인데 조선 말기 사회 인프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와 관련된 다른 에피소드에서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할게요.)

 

오랜 세월 지나온 문화재가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우리 눈 앞에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이유, 또 인위적인 이유로 문화재는 훼손되고 또 복원되면서 지금 우리를 만나고 있지요.

 

경복궁 역시 여러 차례 훼손과 복원을 반복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Tip.경복궁 궐내에는 많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이 잔디밭은 아직 복원되지 못한 전각들의 무덤입니다. 특히 동궐 주변 복원이 많이 부족합니다. 많은 궁궐 건물을 탐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궐내 잔디밭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이재권 / 한누리역사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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