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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시 '회개란 무엇인가'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시사-N 승인 2018.02.02 10:06 의견 0
몇일 전 '손석희의앵커브리핑'에서 <회개>에 대해 다룬 내용 중 서두에 언급한 평양 대부흥의 회개가 지금에 와서는 아골골짜기로 변질되었다는 말에 사족(蛇足)을 달아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1907년에 한국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의 회개사건이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왜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로 접근해선 안된다. 사실 평양 부흥으로 불리는 집회는 크고 작게 3차례 있었다. 1903년, 1907년, 1909년이다. 그러나 이 3차례의 부흥이라 불리는 사건의 전후로 1905년에는 <을사조약(실은 을사늑약)> 이라는 불합리한 조약이 있었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이 있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이러한 평양 대부흥이라는 사건은 왜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까 교회는 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을까 나라가 빼앗기는 현실에 왜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까 결국 그 평양의 부흥은 마음의 ‘카타르시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하나님 나라는 저 하늘에 있습니다” 라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메시지에 교회가 심취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 당시 선교사들과 부흥사들의 메세지는 “이 땅의 나라는 희망이 없어 포기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는 저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이분법적인 메시지가 중심이었다. 이 땅에서 교회가 해야 될 실제 사명은 사라지고 오직 마음과 영적인 부흥에만 치우쳐 그것에 몰두한 채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을 맞이했고 그 결과 나라가 빼앗긴 결과를 낳는데 일조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현실적 사명에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회개운동이라 일컫는 평양대부흥 속에 기독교의 회개는 점차 세상과 멀어져 갔기에 친일을 역사적인 숙명으로 받아드리기 시작했으며, 더 치명적인 사실은 그러한 교리를 외쳤던 교계의 지도자들은 친일파들과 손잡고 보수 뉴라이트 계열의 기독교로 성장해 나갔다.

 

우리는 다시 <회개>란 무엇인가의 문제 앞에 직면해야 한다. 집회나 수련회에 참석해서 불끄고 눈물, 콧물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상식적인 시민의 역할들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최면같은 도피마법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교회는 바르게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 역사의 과제는 반드시 같은 패턴으로 돌고 돌아 다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이민우 목사 / 세상의 벗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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