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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12)] 보다와 해석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2.13 16:17 의견 0

‘우리는 무엇으로 보는가 이런 질문을 학생들에게 해 보면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눈’입니다. 이 글을 읽은 많은 분들도 그렇게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눈일까’라고 반문 하면 학생들은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답을 내기 어려워합니다.

나의 사진집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 문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가십거리로 읽고 보고 맙니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보는지 그런 궁금증을 가지지 않아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말장난 같고 머리를 혼미하게 하는 작품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합니다.

(다행히 그 작품은 외면당하지 않고 영암의 ‘하정웅 미술관’에 스무 점 한 세트가 고스란히 소장 되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타고 싶었던 새 오토바이를 한 대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높으신 하정웅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보는가 이 문제는 철학분과에서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담론입니다. 지금은 의학과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이 문제를 눈의 문제로만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뇌의 신경 네트워크까지 들여다보게 되었으며, 불교에서는 오온의 연기 작용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김홍희작가 제공 김홍희작가 제공

우선 진화론에서 보는 눈은 이러합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흉내 낼 수 없는 온갖 장치들을 모두 가진 눈... 눈이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솔직히 고백 하건데 무리가 있는 듯하다.”라고 <종의 기원> 1859년 초판에 썼습니다.

눈은 캄브리아기에 탄생 했다고 추정 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앤드루 파커는 “눈의 탄생은 지구역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빛의 스위치가 켜졌다‘고 표현 합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입니까 빛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캄브리아기 이전에는 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빛은 그렇게 큰 구실을 할 수 없었지만 눈의 탄생으로 인해 세상은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5억 4300만 전의 사건이라고 과학자들은 말 합니다.

눈의 탄생은 눈을 가진 능동적 포식자들의 진화를 부추기고 지금의 카메라를 든 이미지의 포식자가 생겨나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눈을 가진 포식자들에 의해 눈을 가진 자와 없는 자들 사이에 엄청난 진화의 촉발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것을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고 부릅니다.

지질학적으로 눈 깜박할 사이에 동물문의 수가 3개에서 38개로 엄청나게 불어났고 오늘날까지도 그 수가 그대로 유지 되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청각, 후각, 촉각은 서서히 진화 했지만 눈의 진화의 속도는 도약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속도에 가속도를 더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 중의 하나로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어디서 유래‘ 했는지 설명해 줍니다. 딜런 에반스 에버스는 그의 책 <진화심리학>에서 우리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포식동물 피하기, 적절한 음식 먹기, 동맹 및 친구 찾기, 다른 사람들의 마음 읽기, 의사소통, 배우자 선택이 필요 했으며 이런 진화는 미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다시 말해 심미적인 선호는 우리 뇌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태어나면서 우리 뇌 속에 이미 생존에 대한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예로 허리 대 엉덩이의 비율은 다산성과 관계되어 미의 기준으로 내면화 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어쩌면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허투루 생각 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약간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눈과 빛의 스위치가 켜지는 데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바로 두뇌의 신경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과 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뇌>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우리가 보는 이미지가 외부에 있는 사물의 복제물(replica)이라고 볼 수 없으며, 뇌 안에서 선택하고 해석하는 것이라 주장 합니다. 우리는 실재하는 이미지를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재의 이미지가 아닌 뇌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의 불교의 유식론과 어떤 점에서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세계의 경험을 축적 합니다. 그리고 그 축적물은 생존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생존은 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뇌는 우리가 알고 인정한 것으로 모든 것을 뇌의 생존을 편의를 위해 해석하려고 합니다.

시각은 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뇌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 서구의 생각입니다.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의 저자, 라마찬드란 박사는 지구상의 어떤 다른 생명체도 인간이 보는 방식으로 보는 종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뇌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뇌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믿고, 경험했던 편견들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시각적 착시는 단지 빙산의 일각으로 현대 뇌과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믿음, 의견, 신념이 어쩌면 세상에 대한 뇌의 착시적 해석일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뇌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 하면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원인은 진화, 유전, 교육, 학습, 경제적 조건, 지식, 기억 등입니다. 신경생물학자 로저 스페리는 ‘뇌는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기계가 아니고,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기계’라고 말 합니다. 과거의 경험, 편견은 늘 우리를 속일 궁리만 한다는 것이 바로 뇌의 특징 중에 하나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본다는 것은 뇌의 역할 중 하나로 언제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을 기대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오늘 살펴보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서구의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뇌의 기원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 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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