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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14)] 눈과 뇌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2.15 18:22 의견 0

사진은 눈으로 시작해 눈이 결정하는 시각적 이미지라고 우리는 생각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면만을 본 것으로 좀 더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사진가가 보았던 것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문제의 논지가 있습니다. 일단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각은 다섯 가지 감각 가운데-오감,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았습니다. 사진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또 다른 보는 것으로 끝이 나는 시각언어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다루겠습니다.)이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사진을 보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시각의 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뇌의 절반이 시각영역이고, 영장류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너무나 급격한 진화를 통해 발달해 온 눈의 진화에 대해 자연 선택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 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이 문제도 논지 이외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눈과 같이 정밀한 기관이 순수한 진화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눈이 믿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진화 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렇지만 눈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피사체는 우리의 망막에 거꾸로 맺힙니다.

동물은 망막이 뒤집힌 상태로 진화해 왔습니다. 또 빛에 반응하는 세포가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정상이지만, 눈에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망막 후반부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세포층과 혈관이 있어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영상에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그림자가 생깁니다. 진화의 아이러니입니다.

김홍희작가 제공 김홍희작가 제공

이 그림자들의 지우는 것이 바로 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 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을 잡고 있는 힘줄 6개가 눈을 당기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눈은 항상 흔들리는 상태 입니다. 카메라에는 손 떨림 방지 장치가 있지만, 눈에는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 눈은 계속해서 격렬한 떨림 가운데 상을 맵핑하며 불필요한 것들을 빼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정지된 화면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신경은 망막 한 가운데를 파고 지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레 블랙홀과 같은 맹점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맹점으로 인해 생긴 블랙홀은 우리의 지각에서 사라지고 정상적인 상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뇌가 주변 배경을 복사해서 블랙홀의 맹점을 메우기 때문입니다. 마치 컴퓨터 자판에서 'ctrl+c'와 'ctrl+v'를 누르듯.

뇌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뇌는 스스로 학습하고 신뢰한 것, 예전부터 알고, 믿고, 경험했던 편견들을 토대로 일련의 경험을 축적하지만 이것들은 바로 ‘뇌의 편견’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일종의 ‘시각적 착시’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각적 착시는 우리가 본다는 전체 문제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 합니다.

현대 뇌 과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믿음, 의견, 신념이 어쩌면 세상에 대한 뇌의 착시적 해석일 수도 있다고 말 합니다. 뇌는 세계를 비슷하게 볼 수는 있으나 똑 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뇌는 눈에 들어오는 정보를 패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사람, 원숭이면 원숭이라는 패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픽셀로 인지하는 것과 유사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부분 착시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 또한 착시현상의 한 예라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프레임을 선택 하듯이, 선택이란 내가 원하고, 선호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선 선택하고 나중에 선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뇌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선택하고 나서 다시 합리화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문제와 연결되어 오랜 동안 우리를 괴롭혀 왔던 인류의 숙제였습니다. 그러나 뇌 과학을 발전으로 이 문제는 과학의 영역으로 많은 부분이 넘어 가 버렸습니다. 본래 철학에서 다루던 수많은 문제들이 다른 전문분야로 나뉘어 갈라지듯이.아무튼 '본다'라는 것은 눈과 뇌의 합동작전입니다. 눈은 렌즈이고 뇌는 촬영자쯤 될 것입니다. 촬영자라고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뇌를 가진 사람이지요. 망막에 맺혀진 상은 중개소인 외측슬상체핵을 거쳐 전기 상태로 뇌에 전달됩니다. 이럴 때 본다는 것은 손을 더듬는 것과 유사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서 뇌로 전달되는 신경의 수는 100만개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신경들은 외측슬상핵이라는 곳에서 뇌에서 오는 신경들과 합쳐집니다. 그 때 뇌에서 오는 신경의 수는 자그마치 눈에서 오는 신경의 수의 네 배인 400만개이기 때문입니다. 눈의 기능적 전달력을 뇌가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다시 말해 신경의 신호 중 1/5민이 외부로부터 오는 신호이고, 나머지 4/5는 이미 뇌 안에 있는 해석 신호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다고 하는 눈과 뇌의 기계적 시스템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각의 본질은 형태, 움직임, 색깔 등입니다. 특히 색깔은 녹색과 빨강입니다. 이 색의 구별은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흑백으로 보고 박쥐는 초음파로 봅니다. 모두 진화와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감은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뇌가 그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뇌가 해석하게 되었다고 말 했습니다. 그러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감각 중의 최고 감각인 눈도 이렇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 설상가상으로 생각이 10이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1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와 언어도단의 세계가 바로 여기서 열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부정적으로 볼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이나 예술가들이 말을 아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언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나 깨달음이나 예술의 궁극적인 지표는 언어의 세계 너머에 있습니다. 문학조차도 “행간을 읽어라”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오해는 말의 부족에서 나오고 말로는 아무리 자기 생각을 토로해도 그 용어가 일치 되지 않으면 의미를 계속 미끄러져 내리기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사실이란 것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습득한 세계는 대단히 개별적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뇌 또한 획일화 가능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뇌는 자기가 학습하고 축적한 방식대로 세상을 인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정당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절대적 뇌의 해석을 우리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 합니다.

여러분, 당신은 세상을 눈으로 봅니까 아니면 뇌로 해석 합니까그렇다면 뇌가 바로 당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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