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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23)] 미아리 옥탑방의 추억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2.19 13:38 의견 0
비가 온다. 비가 오니 옛 생각이 떠오른다.

 

결혼 후 두 번째 집은 옥탑 방이었다.반 지하를 벗어났다는 게 일단 행복했다.

 

비 오는 날이면 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번데기탕에 소주 한잔 마시는 건 정말 낭만적이었다.

 

한번은 기백엄마가 기백이랑 기현이를 데리고 친정엘 갔는데 마침 그날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 회식 날이었다. 모두 거나하게 취한 후 헤어졌고 나와 집 방향이 같은 김형구 촬영감독(이하 김 감독)과 함께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은 김감독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실장님, 오늘 기분 더러운데 소주 한잔 사주세요.""제 옥탑방에서 한잔 더 하실래요" 촬영현장에서 내 음식솜씨를 이미 경험한지라 김 감독은 흔쾌히 '좋다'고 한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무지 추운 옥탑방은 보기엔 왠지 낭만적이다.

(사진: 이정환)

 

김 감독은 나와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을 함께 하기 전에 신씨네에서부터 인연이 있던 터라 무척 친했었다. 김형구, 박현철 두 촬영감독은 중앙대 사진과 출신 동기다. 미국의 유명한 영화학교 AFI에서 공부한 재원들인데 당시엔 영화판이 도제시스템이라 데뷔를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지금 두 사람은 한국종합예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지도한다고 들었다.

 

아무튼 우리는 미아삼거리에서 내렸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나와 김 감독은 비에 쫄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옥탑방에 도착했다. 나는 안주감을 만들며 김감독에게 일단 샤워부터 하라고 한 후에 옷가지를 챙겨줬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서 대충 술안주를 만든 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아내는 <겨울 이야기>의 곽지균 감독이 연출하는 <영웅의 이름으로>라는 영화의 미술감독이었는데 반 이상 찍은 영화가 엎어졌다는 거다.

 

충무로 초유의 사태다. 반이 넘게 촬영 중인 영화가 중단이 되다니!

 

그 영화사는 망할 게 뻔하고 그 책임이 감독에게 있다면 곽지균 감독은 영화판을 떠나야 한다. 게다가 충무로 영화판에 대한 제작비 투자가 얼어붙을 게 뻔한 일이었다.

 

그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밤새 부어라 마셔라 했고 나와 김형구 촬영감독은 거의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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