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파크] 007 스카이폴 - “장엄한 끝과 후련한 시작”

강동희 기자 | 기사입력 2018/02/23 [14:22]

[무비파크] 007 스카이폴 - “장엄한 끝과 후련한 시작”

강동희 기자 | 입력 : 2018/02/23 [14:22]

냉전시대를 무대로 한 전형적인 영화 007 시리즈.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작품의 배경인 냉전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역대 본드들을 소환해 비교 대조하는 작업이 영화리뷰와 비평의 주류를 차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전 그런 종류의 007 영화보기에 회의적이었습니다. 007 시리즈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은 해당 시리즈가 사나이들의 혈기-마초본능을 얼마나 자극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의 돈을 벌었는가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50년 세월을 이어온 시리즈’, ‘냉전 시대의 산물’ 같은 수식어는 007 시리즈의 출발점을 보여주지만 그것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007스카이폴. 시리즈 탄생 50주년 작이자 23번째 작품.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이미 냉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여전히 근육질 몸에 싸움 잘하고 어딜 가도 미녀가 따라붙는 남자 주인공을 동경하지만, 그런 주인공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어도 많죠.

 

그런 점에서 <007 스카이폴>은 냉전이 끝난 시대에 본드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고자 기획한 작품입니다. 이 당위성을 극 중에서, 관객들 앞에서, 심지어 투자자들에게 입증해야만 하는 태생적 부담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007 스카이폴>은 이밖에도 많은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M’을 연기한 주디 덴치는 다음 시리즈의 출연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007 못지않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캐릭터를 퇴장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뿐입니까? 당시는 007 탄생 50주년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장치도 영화 곳곳에 심어야만 합니다.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많은 시리즈였던 거죠.

 

7번의 시리즈에서 M역을 맡은 주디 덴치.
“그 속을 알 수 없는 한 개인의 위협이야말로 더욱 치명적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놀랍게도 <007 스카이폴>은 이 모든 과제를 훌륭히 해냈습니다. 지난 반세기의 007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가교역할을 충분히 한 수작입니다. 특히, “냉전이 끝난 마당에 첩보원이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영화 속 청문회 장면에서 M의 대사로 처리해 버립니다.

 

“폭력의 동기는 이제 국가에서 개인으로 이동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국가의 공격이 아닌 그 속을 알 수 없는 한 개인의 위협이야말로 더욱 치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M16, 나아가 00으로 시작되는 첩보원들의 역할이 오히려 더욱 필요하다.”

 

설득력이 상당하죠. 007의 존재가 구시대적이라며 M을 공격한 극중의 장관도 시인 테니슨의 명구를 인용한 M의 연설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 투자자들도 동일한 감동을 받았을 거고요.

 

냉전시대의 괴물과는 다른 악당 '실바' (출처: 네이버 영화)

 

M이 ‘말’로서 시리즈 유지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동안, 제임스 본드는 ‘액션’으로 시리즈의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악당 ‘실바’는 ‘냉전이 만든 괴물’이 아닙니다. 그 동안 본드가 맞서온 악당들과 결이 다른 인물이죠. 하지만 연출자 샘 맨더스는 한 개인인 본드와, 역시 한 개인인 실바로 ‘국가 대 국가’의 대결 못지않은 서스펜스와 스케일을 끌어냅니다.

 

<007 스카이폴>의 탁월함은 이 영화의 기호와 상징들이 무척이나 영리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악당의 첫 등장을 보세요. 본드를 결박한 채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실바의 모습입니다. 본드와 자신을 땅굴에 갇힌 두 마리 생쥐로 비유하며 본드와의 악연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 롱테이크는 007시리즈 역사에 남을 명장면입니다.

 

또 영화 시작과 동시에 오발탄에 맞아 폭포에 떨어진 본드가 ‘사실상 사망’으로 처리됐다가 살아서 다시 등장하는 장면을 볼까요?

 

이는 명백한 송구영신의 상징입니다. “취미가 뭐냐”는 악당의 질문에 “부활”이라고 답하는 본드의 대사,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본드가 어린 시절 통과의례를 거쳤던 땅굴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장면에서 이 상징이 더욱 구체화됩니다.

 

총이란 총은 다 팔고 아버지의 엽총만 남겨놓은 아저씨는 어떻습니까? 아버지 세대의 가치에 대한 존경과 긍정을 이보다 명료히 드러내는 설정이 또 있을까요?젊고 경박하지만 본드와 한 편인 새로운 ‘Q’는 어떻습니까? 이는 죽었다가 살아나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는 시리즈가 십대, 이십대 영화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재기어린 초대장입니다.

 

새로운 Q의 등장은 007의 세대교체를 의미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냉전의 굴레를 벗어던진 본드는 이제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와졌습니다. 상징적 어머니였던 M을 떠나보낸 그는 부모로서의 상징성이 없는 젊은 남자 M을 자신의 새로운 상사로 덤덤히 받아들입니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한 본드가 상징적 어머니를 잃은 직후 다시 한 번 성장했음을 상징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진 본드의 새로운 50년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한줄 평: “본드걸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올바른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 예술의 역할인가?

 


 

¶ 편집자 주

 

다니엘 크레이그를 6대 제임스 본드로 선택한 이후 007 시리즈는 새로운 변신을 모색합니다. 2006년 <카지노 로얄>, 2008년 <퀀텀 오브 솔러스>를 거치며 새로운 본드와 007 시리즈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성공합니다. 2012년 <스카이 폴>이 지난 반세기의 007을 돌아보고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2015년 <스펙터>는 망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스펙터>의 실패로 다니엘 크레이그는 본드 역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는데, 앞으로 2편의 007영화에 더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1월 개봉예정인 25번째 007에서도 다니엘 크레이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디 덴치는 17번째 007인 1995년 작 <골든아이>부터 출연해 <스카이폴>까지 7편의 시리즈에서 M16의 수장 M역할을 맡았습니다. 1934년생으로 올해 83세의 연로한 배우이지만 최근까지 <오리엔트특급 살인>, <튤립 피버> 등에 출연,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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