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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29)] 내가 그때까지 어떻게 살겠냐?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3.05 11:00 의견 0
할머니는 내가 대학 일 학년 때, 그러니까 1983년에 서울로 오셨다. 1980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전주병무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작은아버지가 3년을 모셨다. 작은아버지가 할머니를 계속 모시겠다고 했는데도 아버지가 장남이 모셔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서울로 오게 되었다.

 

몇 년 전 할머님은 92세로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천수를 다하셨다. 백수 가까이 누리셨다.

 

내가 군에 입대할 때 "할머니 저 제대하는 거 꼭 보셔야 합니다."라는 나의 작별인사에 "내가 그때까지 어떻게 살겠냐"라고 대답하셨던 할머니, 하지만 제대할 때까지 할머니는 건강하게 사셨다.

 

내가 장가 가기 전에는 "할머니 이 큰손주 장가 가는 거 보시고 돌아가셔야 해요."라고 얼굴 볼 때마다 말씀 드리면 그때마다 할머니는"내가 그때까지 어떻게 살겠냐"라고 대답을 하셨다. 여전히 정정하셨다.

 

내가 결혼을 하고 분가해 살다가 집에 오면 할머니께,"할머니 제가 아들 낳는 거 보고 가셔야 해요"라고 말씀을 드리면 할머니는 "내가 그때까지 어떻게 살겠냐"라고 말씀을 하셨다.그리고는 20년을 넘게 더 사시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장손인 나를 유달리 예뻐하셨다. 당신 자식들보다 큰손주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다른 손주들보다도 유독 나를 예뻐하셨다. 우리 식구들의 기억에 할머니는 그저 나만 예뻐하신 분이다.

 

할머니 제사상을 차리는 건 할머니가 제일 미워하던 큰 손주며느리 기백엄마의 몫이다.

(사진: 이정환)

내겐 둘도 없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내 고등학교 동창인 영석이라는 친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혼자 자취를 해서 자립심도 컸다. 우리 학교 친구들이 돈암동에서 미팅을 종종 했는데 그 미팅의 주선자는 항상 영석이였다. 여학생 쪽으로 무척 발이 넓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말썽쟁이로 찍힌 영석이와 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영석이는 나 때문에 술과 담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영석이 덕분에 여학생을 사귀게 되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엔 그 친구한테 춤을 배우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돈암동 음악다방에서 디제이를 할 때 이 친구는 서빙을 했었다. 그러다가 1987년 내가 재대 했을 때 영석이는 돈암동에서 제일 잘 나가는 카페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돈을 버는 데엔 타고난 재주를 가진 친구다.

 

그런 영석이가 돈암동 건달들한테 카페를 빼앗기고 도망을 다니게 되었고 딱히 머물 곳이 없었던 영석이는 우리 집에서 한 달간 숙식을 해결했다. 그 이유로 지금까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친구이다.

 

아무튼 벌겨 벗겨놔도 북극에서 냉장고를 팔 친구가 영석이다. 하지만 영석이가 우리 집에서 한 달간 기거를 할 때 할머니는 이 친구를 너무나도 미워했다. 할머니는 그저 손주 밖에 모르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구박을 받던 영석이는 할머니의 부음을 접하자마자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문상을 왔다. 그리고 커다란 화환으로 내 체면을 세워줬다. 할머니 가시는 길에 노잣돈으로 쓰라며 두툼한 봉투를 내밀고는 나와 함께 하룻밤 빈소를 지켰다.

 

시집을 온 후로 할머니의 미움을 받으며 십여 년간 할머니의 수발을 받아준 아내는 할머니의 임종을 나와 함께 지켜봤으며 장례식 기간 3일 내내 손님을 치르며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치렀다.

 

"내가 그때까지 어떻게 살겠냐" 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시던 할머니. 나를 예뻐하느라 내 아내와 내 친구를 미워한 할머니는 그 말씀을 처음 꺼낸 후 정확히 32년을 더 사시고 하늘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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