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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삶과 죽음을 음식에 녹여내다" - 연극 '가지'

김혜령 기자 승인 2018.03.09 20:50 의견 0
2017년 국립극단에서 진행한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을 통해 선보인 줄리아 조의 작품 "가지"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연극 "가지"는 한국의 핏줄을 가진 한국계 외국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에 등장한 다양한 연극 중에서도 발군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보여줬다. 또한 54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요리사 아들이 아버지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여자친구, 삼촌, 호스피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음식과 사연을 독백으로 풀어낸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레이 (국립극단 제공)

 

주인공 레이는 재미교포 2세로 아버지와 언어, 입맛, 문화가 모두 다른 인물이다. 레이는 프랑스에서 요리를 배워와 고급 요리를 아버지에게 선보이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1달러가 넘지 않는 햄버거, 라면을 선호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레이는 어느새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대면하고 있다. 한국말을 모르는 레이는 전 여자친구 코넬리아의 도움으로 한국에 있는 삼촌에게 전화를 건다. 그렇게 레이는 삼촌과 간병인, 코넬리아와 함께 아버지를 알아가며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순간들을 준비하고 정리한다.

 

장면 중간중간 등장하는 배우들의 독백신이 매력적이다. 배우들이 자신의 사연을 독백으로 전달하는 장면들은 단편 모노드라마들이 옴니버스로 이어진 극이라 여겨도 될정도다.

 

배우 혼자 긴 대사를 풀어내지만 관객들을 집중시키고, 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배우들은 대사에 나타난 섬세한 맛의 표현, 추억을 읊는 장면들을 통해 관객을 극 속 소녀와 난민 소년의 기억 속으로 끌고 간다.

 

오디를 맛보며 레이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코넬리아. 배우가 이끌어가는 긴 독백신이 매력적이다.

(국립극단 제공)

 

또한 초연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이 다시 출연해 더 깊어진 감정선을 보여주며 극의 작품성을 한층 끌어올렸다.

 

레이 아버지 역할의 배우 김재건은 떠나가는 아버지의 독백을 담담하게 내뱉는다. 레이 역을 맡은 김종태 배우 역시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버지를 보내는 아들의 연기로 관객들의 감수성을 촉촉하게 적셨다. 거기에 코넬리아 역 우정원, 삼촌 역 김정호, 루시앙 역 신안진의 연기가 어우러져 잘 비벼진 비빔밥 같이 조화로운 연기세계를 보여준다.

 

연극의 말미. 레이는 아버지를 위해 자라탕을 만들지만 아버지는 끝내 레이의 요리를 맛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때마침 아버지의 단골 치과에서 진료예약을 확인하기는 전화가 걸려온다. 레이가 알던 아버지는 그저 싸구려 음식이나 좋아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가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주는 전화통화를 통해 뒤늦게나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뒷 모습을 알게 된다.

 

거울을 통해 매 순간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레이

(국립극단 제공)

 

극은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마무리 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레이의 독백이라는 극적 장치로 대단원을 향한다.

 

레이는 아버지의 관한 기억 속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아버지를 상기하게 된다.홀로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밥을 먹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변화된 아버지의 모습을 눈치 챈 레이가 이유를 묻지만, 아버지는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 말해놓곤 아무런 설명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정장을 입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본 레이는 그제서야 나무로 짜여진 틀 속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나무로 만든 또다른 틀인 관 속의 모습과 닮았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려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극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전달한다.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장면은 아버지와 레이, 두 사람이 이미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던 사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화해했음을 알려 준다. 동시에인간은 매 순간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죽음은 한 끼 식사, 죽음은 거울, 죽음은 제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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