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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살인소설 - “추리인 듯 추리 아닌 최고의 공포물”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3.14 22:58 의견 0

주인공 엘리슨 오스왈트는 소설 쓰는 일로 일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직접 저술한 실화소설 <켄터키 블러드>로 잘 나갔지만, 후속작들의 반응은 그저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 그가 온 가족을 이끌고 한 폐가로 이사를 합니다. 일가족 중 네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실종된 집으로 말이죠. 경찰도 포기한 이 일가족 살인 사건을 스스로 조사해 <켄터키 블러드>의 후속작을 써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계획입니다.

이사 첫 날, 그는 다락방에서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수 세대에 걸친 일가족 연쇄살인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애초 이사 온 목적을 떠올리며 직접 사건 조사에 나서기로 합니다.

다락방에서 연쇄살인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발견한 앨리슨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살인 소설>은 추리물이자 공포물입니다. 미제 살인 사건을 조사한다는 점에서 추리물이지만 추리 과정에서 주인공이 처하는 온갖 괴이한 상황들은 모두 공포 영화에 사용되는 도구들이죠. 그러나 미리 말씀드린다면 공포물로서의 <살인 소설>은 대단히 성공적이지만, 추리물로서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영화가 관객을 겁주기 위해 만든 장치들은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효과적입니다. 무섭게 하려고 넣은 장면들이 정말 다 무섭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 영화가 잔인한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연출 방식은 대단히 획기적입니다.

앨리슨이 보는 일가족 살해 동영상에는 사람이 산 채로 불타 죽거나 잔디 깎기에 머리통이 날아가는 장면 따위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비디오테이프 속 장면들을 관객에게 전달할 때마다 폭력의 수위를 고의적으로 한 단계 낮춥니다. 훼손되는 신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효과음 따위로 관객을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소리는 최대한 죽이고 잔인한 장면은 앨리슨의 안경에 반사시켜 간접적인 영상을 노출하는 식입니다.

고의적으로 폭력의 수위를 낮춤으로 훨씬 더 공포스러운 영화 <살인소설> (출처: 네이버 영화)

그 결과 극중 앨리슨이 질렀어야 할 비명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이 되고, 신체가 훼손되기 직전 겁에 질린 영상 속 피해자들의 표정은 그대로 관객의 표정이 됩니다. 이런 장치들은 선혈이 낭자하는 것보다 훨씬 공포스럽고, 불쾌한 뒷맛도 훨씬 오래 남게 합니다.

일가족들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영상을 관객에게 직접 노출하지 않는 연출은 앨리슨이 보는 동영상을 더 무섭게 느껴지도록 하는 효과도 있지만, 죄책감을 일정량 덜어니며 관객으로 하여금 부담없이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이 '금지된 쾌감'은 작품의 기본 정서인 공포감과 뒤섞여 대단히 불쾌하고 불길한 기분을 낳습니다. (국내에 <살인 소설>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 바로 sinister, '불길함'입니다. )

글 쓰다 미쳐가는 가장의 이야기 영화 <살인소설>(출처: 네이버 영화)

글 쓰다 미쳐가는 가장의 이야기란 점에서 <샤이닝>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견해도 많지만, 저는 불길함이라는 감정에 주목하고 또 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동영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재패니즈 호러물인 <링>과 비교하고 싶습니다. 물론 <살인소설>엔 영상 속 인물이 화면에서 기어나오는 일은 없지만, 서늘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질감만큼은 <링>의 그것을 능가합니다.

주인공이 살인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기 위한 증거로 동영상 자료를 획득한 덕에, 영화는 구조적으로도 이득을 봅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공포스러운 시각적 자료부터 마구 풀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 <살인 소설>에는 공포영화의 절정부에나 한 번 나옴직한 장면이 첫 장면부터 계속 쏟아집니다. 무서운 장면을 기대한 관객들은 예열 단계도 없이 살생과 비명의 향연으로 즐거웠을 겁니다.

도입부에서 증거를 주인공에게 줄줄이 나열하는 단계를 지나 조각난 증거들을 재편집하는 영화의 중반 단계에 이르면 공포는 점점 더 심해집니다. 앨리슨은 보안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열심히 실마리를 풀어나가지만, 인과와 논리를 캐면 캘수록 범인의 정체나 범행의 동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 희생자는 내 가족'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알게될 뿐입니다.

다음 희생자는 내 가족 (출처: 네이버 영화)

더 무서운 건, 다음 희생자가 나와 내 가족임이 분명함에도 점점 더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입니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고, '위치'를 지켜야 하는 이타적 의무감이 각각 '물욕'과 '명예욕'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으로 변합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불안 심리와 맞물려 광기에 이르는 과정을 대단히 설득력있게 제시해 나갑니다.

결국 앨리슨은 늪에 빠진 들짐승처럼 허우적거리다 그 집을 나올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늪에서 나오기 위해 잡은 구원의 손길이 살인마의 덫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요.

하지만 '무서운 동영상'을 보며 추리해서 나온 결론이 결국 '초자연현상'이라는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무척이나 맥이 실망하게 됩니다. '추리'란 게 뭡니까 사건을 둘러 싼 논리를 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시간동안 추리해서 나온 결론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니, 추리물로서는 해도 너무한 결말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말을 오컬트 장르의 새로운 클리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아주 강렬한 즐거움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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