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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38)] 문인화와 방서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3.27 10:06 의견 0

우리나라에는 문인화라는 예술 장르가 있습니다. 선비가 글을 쓰고 남은 먹으로 매, 란, 국, 죽을 그리거나 다른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화제나 그림의 의미를 담았습니다.그림을 그리고 그 옆에 글을 쓰는 예술 장르는 동서고금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인화는 독특합니다.

문인화 옆에 쓰는 글을 방서라고 합니다. 방서를 쓰게 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이렇습니다. 선비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화공만큼 그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화공은 평생 그림을 그려 밥을 먹는 사람이고, 선비를 문재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 두 사람의 격차를 줄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서를 써서 화공보다는 못한 그림이지만 화제나 그 그림의 의미 또는 편지 같은 것을 써서 선비들의 멋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은 어떻습니까 사진에는 캡션이라고 하는 것이 붙습니다. 특히 다큐멘터리나 저널 사진에는 필히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홍희 작가 제공)

오래 전 학생 운동이 성행했을 때 한 장의 사진에 두 가지 캡션이 붙어 나왔습니다. 수구 쪽 신문과 진보 쪽 신문의 예입니다. 화염병의 불이 몸에 붙어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뒹구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신문의 캡션은 이랬습니다.

“화염병 불이 붙은 학생을 발로 차는 형사”또 한 신문의 캡션은 이랬죠.“화염병 불이 붙은 학생의 불을 끄기 위해 발로 불을 끄고 있는 형사”

같은 사진에 두 종류의 캡션이 붙었습니다. 물론 신문도 다릅니다. 그럼 여러분 각각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한 쪽 신문을 읽은 사람은 불 붙은 학생을 발로 차는 형사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쪽의 신문을 읽은 독자들은 불을 끄는 형사를 기억하겠지요.

이렇듯 사진은 전후 상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믿는 것이 아니고 사진에 쓰여진 캡션을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진 그 자체는 일련의 상황 전후를 잘라 한 순간만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캡션은 그것을 기록하는 기자의 양심에 따라 기술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신뢰할 수 없습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불을 끄기 위해 발을 놀리는지 학생이 미워 발로 차고 있는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까요 팩트를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습니까 사진은 어떤 사실을 찍지 진실을 찍지는 않습니다. 기자도 좌향이 있고 우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정해야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까지 중립을 지키라고 말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선입견이 작용할 지도 모릅니다.

문인화의 방서에 그 선비의 정신이 드러나 듯, 저널 사진에도 저널리스트의 무의식이나 편집자의 무의식이 실리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리는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포토저널리즘의 사진의 캡션은 그것을 촬영한 저널리스트의 양심에 기댑니다. 그렇지만 잘 못 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사진은 어떤 사실을 전하지만 그 전후의 속사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즘 사진에 붙는 캡션은 저널리스트이 양심에 의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인화의 방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포토샵이나 암실에서 어떤 경우에도 조작되거나 재구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단 예술로서의 사진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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