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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38)] 영화감독 박찬욱 그리고 나의 셀마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3.28 10:21 의견 0
영화 <삼인조> 이후에 쉬고 있던 박찬욱을 충무로 베어가든으로 불러냈다. 흥행에 기대를 걸었던 영화 <삼인조>의 처참한 실패 이후 충무로 제작사들 사이에서 ‘박찬욱은 천재성은 있으나 흥행은 안 되는 감독’이라고 인식이 되었고 더 이상 박찬욱을 찾는 영화사가 없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만남의 장소인 베어가든으로 들어오는 박찬욱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찬욱형, 꼭 실사영화만 할 거야 우리 토이스토리 같은 3D 애니메이션 한 번 만들어볼까”라고 물었다.

 

박찬욱은 SF 마니아다. 지금도 그렇지만 SF영화를 실사영화로 만든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그 당시의 상황에선 거의 불가능했다.

 

“괜찮네. 그럼 정환씨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 중에 어떤 걸로 할까”

 

“형 햄릿이 마음에 드는데…… 그걸로 정하지.”

 

“그래 나도 그게 맘에 들어. 캐릭터를 조금 바꾸자. 여자 햄릿인 거야. 그녀의 이름은 셀마.”라면서 말을 계속 잇는다.

 

“햄릿의 철자 HAMLET을 순서를 바꿔서 THELMA 셀마라는 공주 햄릿이 되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에 대 반전을 넣은 거야. 모두다 깜짝 놀랄 반전인데 기독교계에서 성경을 불경스럽게 왜곡했다고 욕깨나 먹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것도 일종의 안티마케팅이지.”

 

일단 시나리오 작업을 할 호텔을 잡았다.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이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라는 게 꺼림직했다. 워낙 친구관계가 좋고 사람이 좋아서 거절을 못하는 게 박찬욱이다. 분명히 어중이 떠중이들이 밤마다 몰려와서 술판을 벌일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감독 본인이 굳이 충무로를 원하니 초고 시나리오는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쓰기로 결정했다.

 

공동작가로는 박찬욱과 함께 '박리다매'라는 시나리오 팀으로 활동하는 방송인 겸 영화감독인 염소 수염의 이무영 감독이다. 이무영은 초고 시나리오에만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계약조건을 정하자마자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호텔방을 확인 후 나는 집으로, 박찬욱은 호텔방으로 갔다.

 

3D애니메이션 셀마의 트레일러를 갖고 헐리우드에 갔다.터미네이터2의 제작자 래리 카제노프가 트레일러에 반해서 배급계약을 했다.그는 그날 저녁에 나를 위해 파티를 열어줬고 당시에 한참 뜨고 있던 플레이보이 표지모델인 노랑나비 이승희를 파티에 불렀다.

(사진: 이정환)

 

다음날 계약금을 들고 아스토리아호텔로 갔다.아뿔싸 그럼 그렇지!방문을 여니까 술 냄새가 확 풍긴다.

 

박찬욱의 영화판 친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뒹굴며 자고 있는 거다. 나는 성질이 확 났지만 어쩌랴! 다들 나보다 한 살 위 선배들인 걸... 호텔방 안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 그들을 깨웠다.

 

“찬욱이형, 아침 먹으러 가야지 뭘 먹을까”“정환씨 미안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아뇨, 다 예상했던 일인데요. 아무래도 충무로는 너무 서울시의 중심이 아니에요 형이 원해서 여길 잡긴 했는데 아무래도 외곽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박찬욱은 첫날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 게 미안했는지 흔쾌히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아무튼 일행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충 씻은 후에 속을 풀려 꽤나 유명한 충무로 죽집으로 갔다.젠장, 다들 스페샬 전복죽을 먹는다.

 

‘도대체 아침 값으로 이게 얼마야’

 

일단 박찬욱과 이무영에게 시나리오 계약금을 치렀다. 그리고 아스토리아호텔에 이틀을 더 머물렀다. 역시 박리다매팀(박찬욱과 이무영)은 손이 빠르다. 3일 만에 셀마의 초고가 나왔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우면동 교육문화회관으로 옮긴 후, 일주일 만에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다듬어졌다. 이젠 감독 계약을 해야 한다.

 

당시는 DJ정권의 초반이었다. 한참 금을 내다 파는 게 애국인 것처럼 떠들 때였다. 나 역시 금 목걸이와 금 팔찌 등 금붙이를 내다 팔았다. 그 돈으로 감독계약금의 선금을 지불했다. 사실 자금이 많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계약금이 딸려서라기 보단 나름대로 금 파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뿐인데 박찬욱은 그걸 무척이나 짠하게 생각했나 보다.

 

그 때 즈음, 벤쳐기업 바람이 불면서 나도 투자대상이 됐고 모 M&A 회사로부터 어느 정도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자사와의 갈등으로 더 이상 자금 유입이 어려워지자 콘티 작업, 캐릭터 작업, 파일럿필름 작업 등 진행하던 모든 작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박찬욱과는 투자를 다시 유치하기 전까지만 잠시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완성된 시나리오와 사업계획서를 들고 투자유치를 위해 뛰어야만 했다. 물론 박찬욱과의 계약관계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였다.

 

“정환씨, 정환씨가 좋아하는 현풍할매곰탕에 낮술이나 한 잔 하러 나갈까”

 

며칠 만에 만난 박찬욱이 낮술을 마시자고 한다. 거절할 일이 있나 우리 둘은 현풍할매곰탕 특짜리 곰탕을 주문해서 거나하게 취했다. 박찬욱이 내 눈치를 살피며 무척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계약상태가 끝난 것도 아니라서, 정환씨한텐 진짜 미안한 얘긴데 나 잠시만 명필름과 작업을 하나만 하고 돌아오면 안될까 영화제목이 <공동경비구역JSA>인데 말이지, 뭐 흥행영화는 아니고 그냥 의미 있는 작품인 거 같아서 놓치긴 아깝네”

 

나와의 계약관계가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와 계약을 하다니, 사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셀마는 아직까진 투자사가 나서지 않았을 뿐더러 박찬욱의 발목을 잡기가 미안하고 싫었다.

 

“나 정환씨한테 감동받았잖아. 금붙이를 팔아서 나한테 감독계약금까지 줬는데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어 사실 정환씨한테 먼저 양해를 구한 후에 명필름과 계약을 했어야 했는데 나도 이래저래 힘들어서 계약금을 받고 말았네. 오늘 술값은 내가 쏠게. 우리 한 잔 더 마시러 나가자.”

 

그런데 이상하게 박찬욱한테 배신감보단 미안함이 앞섰다.

 

“찬욱이형 마무리 잘 하고 와. 이왕이면 대중성 있는 흥행작품이면 좋겠는데……”

 

박찬욱은 떠났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대박이 났다.박찬욱은 돌아오질 않았고, 나는 셀마 덕분에 큰 투자를 받아서 벤처기업가가 됐다.

 

그리고 셀마의 감독은 다른 이로 교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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