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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48)] 이미지의 배반과 언어의 반역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5.04 11:49 의견 0

우리는 언어와 의미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한 번에 뒤집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기호학에서 기표와 기의라고 부르고 그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오랜 의문과 숙제를 한 번해 해결해 낸 위대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의 알려주는 기표와 기의의 전문을 여기에 옮기면서 설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Tree'라는 문자와 /tiː/라는 소리(음성)는 기표, 나무의 이미지와 '나무'란 개념 자체는 기의라는 것입니다. 이때 기표(記表,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프랑스어: signifie 시니피에[*])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입니다.

"시니피앙"은 프랑스어 동사 signifier의 현재분사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며, "시니피에"는 같은 동사의 과거 분사로 "의미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표란 말이 갖는 감각적 측면으로, 예컨대 바다라는 말에서 "바다"라는 문자와 /bada/라는 음성을 말합니다.

기의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바다의 이미지와 바다라는 개념 또는 의미 내용입니다. 이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기호(記號, 프랑스어: signe 사인[*])라고 합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 즉 의미작용(意味作用, 프랑스어: signification 시니피카시옹[*])은 그 관계에 필연성이 없습니다. 이것을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바다"를 "바다"라고 쓰고 /bada/라고 발음하는 데 있어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것이 있었다면 모든 언어에서 바다는 /bada/로 발음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필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해하는 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되고 있습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고틀로프 프레게가 지적했듯, 기의 즉 "의미 내용" 또는 "개념"은 "지시 대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시 대상"은 레페렌트(referent)라 하며, 기의와는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바다는 바다라는 말은 바다를 의미 하는데 아무런 필연성이 없습니다. 바다를 바다라고 해야 할 필연성이 있다면 영어의 sea나 일본말을 うみ(우미, 海)라는 말이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입니다. 그는 이 그림의 제목을 이미지의 배반이라고 했지만,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이미지의 배반이라기보다는 ‘언어의 배반’ 또는 ‘고정관념의 배반’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캠퍼스에 담배를 피우는 도구인 파이프를 하나 그려놓고 그 밑에 프랑스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작품이 발표 될 때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1857년생의 스위스 언어학자이고 르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 태생입니다.

두 사람의 탄생 사이에는 40년가량의 시대적 갭이 있지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소쉬르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의 논리를 한 장으로 표현하는 철학적 회화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의 작품 ‘이미지의 배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캠퍼스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두 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림 이미지이고 하나는 개념을 가지는 언어 이미지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담배를 피우는 도구인 파이프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언어 이미지입니다.

이 언어 이미지는 파이프가 그려진 캔퍼스 위에서 도도하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주장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 입니까 저는 이 주제를 들고 많은 곳에서 항상 똑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요라며.

우리는 여기에서 소쉬르 다시 들추어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들추어낸다면 당연히 르네 마가리트는 이 자리에 불러 들여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선 한정된 공간을 제시 했습니다. 그것은 캔퍼스입니다. 그 안에 두 개의 이미지를 그려 넣습니다. 이미 말 한 바대로 그림 이미지와 언어 이미지입니다. 이 둘은 한정된 공간인 캔퍼스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존재 합니다. 이것이 르네 마그리트의 함정이자 철학적 유머지요. 우리는 그의 캔퍼스 밖이나 그 안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려고 생각 하지 못 합니다. 왜냐구요 지금 당신은 여전히 캠퍼스 안을 노려보면서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자문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상식적이고 도식적인 견해로는 기호와 기표가 필연성이 없다고 했으니 저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니 파이프를 그린 그림 정도로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르네 마가리트는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 우리는 서구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상상력을 믿어야 하지요.

저는 이 주제로 강연을 하면 청중들을 한참을 골리다가 영어로 다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주체인 언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This is not a pipe.라고 말 합니다. 물론 엑센트는 ‘This’에 줍니다. 이것!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랍니다. 그럼 뭘까요 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쯤 되면 답이 나올 만도 한데 사람들의 언어는 고정관념의 근간이라 역시 답을 낼 듯 낼 듯하면서 한 발자욱도 나서지를 못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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