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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 (66)] 창과 거울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6.15 12:00 의견 0

우리는 가끔 사진을 창과 거울에 비유합니다. 창은 외부를 보는 것을 의미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기도 하지요. 안에서 외부를 볼 때는 세계의 관찰이 될 것이고, 외부에서 안을 볼 때는 관음증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거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거울로 세계를 비추고 그 비춰진 상을 우리가 볼 수도 있습니다. 창이나 거울이나 보는 입장에 따라 이렇게 다른 세계를 비출 수 있습니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 볼 때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를 비춰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의 하나입니다. 세계를 통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방법이지요. 대신 세계에서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세계라고 하는 시선으로 세계의 현시점을 통해 어떤 사회를 보는 방법이라고 말 해도 좋을 것입니다.

창은 이런 점에서 사회와 사회의 관계를 살피는 도구입니다. 거울은 자신이 도구를 들고 스스로를 살피거나 세상을 살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도구를 통해 자신을 비춰볼 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 등장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이 아닌 외부를 비추어 그 비춰진 화면을 보면 너무나도 낯선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거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힘입니다. 개인의 창이라고 말해도 좋지요.

창을 통해 세상을 기록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거울을 통해 세상을 기록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저는 인도를 자주 여행하고 몽골도 자주 다녀왔습니다. 이 두 세계의 극명한 차이는 거울의 숫자에 있습니다. 인도를 가면 어디를 가나 사람으로 북적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제각기 흐르고 장소에 따라서도 시간은 다르게 흘러갑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거울처럼 저를 비추어 줍니다. 인간은 상대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계급과 수많은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됩니다. 인도의 경우 수많은 거울이 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몽골의 경우는 다릅니다. 울란바타르를 빠져 나와 하루 정도 초원을 달리면 거의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 전에 제가 몽골을 최서단인 ‘울기’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때는 거의 10일 이상 사람을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을 만나 볼 수 없었죠.

그럴 때 만나는 것이 자신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언제나 파악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울인 다른 사람을 통해 일어나는 일인데, 그 거울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비추게 됩니다. 이 때 남을 비추는 거울이 스스로를 비춥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이것을 만나면 큰 충격을 받습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몽골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초원에서 당신과 똑 같은 사람을 만나는 그 날이 바로 당신이 죽는 날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끝없는 초원 위에서 만난 자신은 이전의 자신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살고도 만나보지 못한 벌거벗은 스스로를 만나는 행위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을 넘어 스스로 있는 존재. 그를 거울이 없을 때 만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항상 대상과 비교하고 누군가와 자신의 키를 재어 봅니다. 이런 것이 전혀 없는 세계에 가 보기.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작가를 작가답게 하고 인생을 인생답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치는 낯선 자신과 그 거울이 비추는 낯선 세계는 그 자체로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하고 거울에 비친 외부 세계를 낯설다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 한다면 그 거울에 비춰진 세계는 우리 누구에게나 낯선 세계일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를 자신의 인식 속에 낯설지 않게 만들어 익숙함으로 길들일 뿐이지요.

우리는 매순간 낯선 시간과 낯선 장소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익숙한 장소와 익숙한 시간 속에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낯설고 생면부지의 시간을 매순간 접한다고 인정하게 되면 세계는 우리와 유리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창도 이런 점에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창을 통해 외부를 보거나 안을 볼 때 우리는 일정한 인식의 기준을 통해 살핍니다. 그것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편견의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편견의 세계를 한 사람만이 가지지 않고 그 사회 구성원 전원이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절대 직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집단적 편견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를 직시할 수 없게 만드는 아주 강건하고 높은 사유의 벽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런 편견과 오류를 버리고 창을 내다보기. 또는 들여다보기. 또는 내다본다거나 들여다본다는 의식조차 버리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세상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사진집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편협적이고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의 선으로 모든 것을 담아 넣으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람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너머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단 그 너머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 하는 순간 일반인들로부터 유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거나 부처님처럼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상이 바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말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을 창을 통해 보거나 거울을 통해 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진실로 우리 앞에 있는 삶과 생의 광경이 바로 현실이고 현재이고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들여다보는 파인더 안의 세상은 참이 될 것입니다.

카메라는 깡통이고 당신이 들여다보는 것만 찍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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