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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작가의 “사진 잘 찍는 법” (67)] 다큐멘터리와 예술 사진

김홍희 사진작가 승인 2018.06.18 10:39 의견 0

사진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수요가 달라집니다. 세상이 소요 속에 있을 때는 그 소요를 잠재우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당연히 그 소요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고 그 원인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지요. 그러면서 소요가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갉아 먹는지 무용함을 담아 세상을 향해 절실하게 소리칩니다.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저널을 통해 평소보다 많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반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우리는 그 시대를 즐기는 법을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익혀 왔습니다. 유희하는 인간들이 활동을 시작 하지요. 유희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세상이 고요할 때만 등장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이 소요 속에 있거나 고요 속에 있거나 상관없이 유희 합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늙은이는 병들고 죽어 갑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수요는 바뀝니다. 소요 속에서도 모든 일은 진행되지만 고요 속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수요만 변화합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하는 사진만이 유일하게 가치를 가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편견이 어떤 점에서는 작업을 하는 인간에게 큰 힘이 됩니다. 죽고 나면 쓰레기가 될 지도 모르는 일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일에 지속적으로 평생을 투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건 예술 사진이건 사진 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확신과 신념으로 일을 해나갑니다. 대해 누구의 작업이 가치고 있고 없고를 따지는 일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죠. 둘 다 가치가 있지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가치의 기준이 달라질 뿐입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살아나가기 위한 일종의 변화입니다. 가치의 크기는 수요에 의해 변할 수 있지만 그 가치의 본질은 전도되거나 변하지는 않습니다. 시대의 요구는 그 시대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어난다고 우리는 믿고 또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역이나 환경 속에 살면 그런 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읽어는 내지만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해 암흑의 시대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요.

그 암흑의 시대를 거부하는 행위. 이것이 다큐멘터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술 사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도 잘 못 된 시선입니다. 이 둘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양상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두드러지게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 사진 두 개의 세계가 동시에 부흥하는 듯합니다. 정치,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우려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내일의 땟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가 이 시대에 동시에 요구 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은 어느 한 쪽이 득세를 하거나 장악한 시대는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요즘 두드러진 현상은 순수 예술 사진이 이전보다 훨씬 자주 등장하고 우리를 신선한 시선으로 유도 한다는 것이지요.

사진의 전시나 발표를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안정과 함께 안정을 유지한 부류의 가치 혼란의 시대가 다큐멘터리와 순수 예술 사진이 동시에 성행하게 하는 결과를 나았다고 보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정이 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사회악을 고발하거나 미담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보다는 예술 사진이 득세할 것이 분명 합니다. 그리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슬로우한 삶을 추구하게 되겠지요.

다큐멘터리에 인생을 건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은 우리가 원한다고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시대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 시대 보다 나은 시대를 기대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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