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18)] 세도정치: 조선후기 국정농단 - 경복궁 중건 당시 조선의 국내 상황(上)

김혜령 기자 | 기사입력 2018/07/02 [17:03]

[경복궁_이야기(18)] 세도정치: 조선후기 국정농단 - 경복궁 중건 당시 조선의 국내 상황(上)

김혜령 기자 | 입력 : 2018/07/02 [17:03]
19세기의 조선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몸살을 앓는다. 순조, 헌종, 철종 등 3명의 왕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행하지 못했다. 순조는 11살, 헌종은 8살에 즉위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철종은 자신이 왕의 재목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강화도에 묻혀 살았던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치와 거리가 멀어진 왕을 대신해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이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세도정치’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왕을 허수아비로 두고 일부 대신들이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며 국정농단을 자행했다. 한편 두 가문이 서로의 세력을 키우는데 집중하다보니 정치적 폐단이 하나 둘 발생하기 시작했다.

 

정조 임금 때 등용되었던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내쫓으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우선시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만 계속 독점적인 권력을 갖게 되면서 점점 썩은 물로 변하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폐단은 정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의 권력욕은 곧바로 백성들이 생계문제에 고통을 안기는 경제적인 문제를 가속시켰다.

 

뇌물을 바치고 자신도 중앙권력을 가져보려는 지방관들이 들끓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바칠 뇌물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 특히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서 백성들의 생활고를 더욱 어렵게 했다.

 

사진은 세도정치 시대의 인물 효명세자의 어진

(초상화)이다. 화재로 불타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효명세자는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며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183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유정, 박보검 주연의 사극 <구름이 그린 달빛>은 세도정치 시대의 인물 효명세자(1809~1830)를 그렸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세금제도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세 가지로 나뉘었고 이를 합해 삼정(三政)이라 불렀다.

 

전정(田政)은 가진 토지에 대해 매겨지는 세금으로 지금의 부가가치세나 소득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군정(軍政)은 지금의 방위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인으로 징병되지 않는 자들에게 군포(軍布)를 걷는 제도였다.

 

환정(還政)은 곡식이 나지 않는 봄에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가 끝난 후 곡식으로 갚는다고 하여 환곡(換穀)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으로 보면 서민을 위한 정책자금ㅊ대출과 비슷하다 보면 되겠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들어서며 삼정이 문란해졌다. 나라의 세금을 빙자해 백성들의 고혈을 뜯어내기 일쑤였고, 징수한 세금이 국고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방관들을 통해 세도가를 중심으로 한 양반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전정의 경우 실제 가지고 있지 않은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고, 실제 걷어야 할 세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징수했다. 군정은 군역을 감당할 수 없는 아기나 노인에게도 부과되었고 심지어 죽은 이에게까지 부과되었다.

 

환정의 경우, 환곡이 필요없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했다. 빌려주는 곡식에는 모래나 겨를 섞어준 다음 돌려받을 때는 알곡으로만 받기도 했다.

 

양반 계급은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세도가들과 연을 쌓는 것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백성들의 저항으로 이어졌다.

 

세도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 문제도, 경제 문제도 아니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의 국운이 쇠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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