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_이야기(21)] 흥선대원군, 격변의 시기에 권력을 장악하다

송군호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

김혜령 기자 | 기사입력 2018/07/11 [15:36]

[경복궁_이야기(21)] 흥선대원군, 격변의 시기에 권력을 장악하다

송군호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중건 이야기

김혜령 기자 | 입력 : 2018/07/11 [15:36]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지던 상황을 설명해왔다. 이렇듯 국내외적으로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던 조선 말엽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생생히 듣기 위해 대전에서 역사를 교육하고 계시는 송군호 선생님을 찾았다. 이번 편에서는 흥선대원군에 초점을 맞췄다. 경복궁 중건의 주인공이 바로 흥선대원군이기 때문이다.


 

☞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 남연군 이구라는 사람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왕의 피를 타고 난 사람이죠. 여기서 궁금한 게 생기는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왕의 핏줄’이라면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흥선대원군은 왜 직접 왕이 되지 않고 자기 아들을 왕으로 내세웠을까요? 자기가 직접 왕이 되면 더 편하고 좋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시대 ‘양자 입적 원칙’에서 찾을 수 있어요.

 

‘양자 입적’이란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새로 자식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입양이다. 아들을 낳지 못한 집안에서는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해서 친척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호적에 옮겼다.

 

☞ 흥선대원군은 철종임금과 항렬이 같았어요. 게다가 철종은 일찍 죽음을 맞이한 아들이 있었어요. 철종의 대를 이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핏줄인 누군가를 자식으로 들여와야 했어요.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철종과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양자로 들어갈 수 없었죠. 조카가 삼촌 자리로 입양은 가능하지만, 삼촌이 조카자리로 입양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치를 하려는 야심을 품은 거죠.

 

세도정치 세력의 갈등이 흥선대원군을 등장시킨다 

 

☞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 정치적 흐름은 어땠을까요? 당시 조선의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은 안동김씨였어요. 세도정치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정치를 이끌었던 시기를 말해요. 이 시기에는 안동김씨의 권력이 더 강했죠. 그래서 권력을 잡기 위해 왕대비인 조만영이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게 되요.

 

그렇다면, 조대비는 왜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게 되었을까?

왕대비이지만 남편 효명세자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왕실에서의 입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권력을 잡은 세력은 안동김씨 세력이었다. 만약 이대로 둔다면 안동김씨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양자로 들여 왕위에 앉히게 될 것이 보였다.

철저하게 권력에서 소외된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인 이명복을 왕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왕위를 잡고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를 공식 석상에서 발표하는 이는 조대비가 된다.

 

☞ 보통 적장자를 중요시 여긴 조선시대에 왜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을 왕위의 자리로 추천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나이가 성인이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정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12살의 어린나이인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죠. 흥선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합니다.

 

▲ 운현궁에서 전해져오는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제공)     ©시사-N

 

☞ 흥선대원군이 등장했을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한 단어로 이야기 한다면 ‘혼란’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생계유지가 힘들어지자 농민봉기를 일으킵니다. 터무니없는 세금으로 백성들은 보통의 경제생활이 불가능해졌어요.

 

하늘 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성들, 드디어 봉기하다

 

☞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 끝에 닿았고, 1862년 1월 경상도 단성에서 먼저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3월에 진주에서 경상 우병사인 백낙신이 부당하게 세금을 걷으면서 진주에서도 농민봉기가 일어나죠. 잔반 유계춘의 주도로 일어난 진주농민봉기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당시 진주는 경상도에서 큰 도시였기 때문에,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흐름을 타고 함흥부터 제주까지 72개의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요. 이를 1862년, 임술년에 일어난 농민들의 난이라고 해서 임술 농민봉기라고 불러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는 1863년이니, 그 시기에도 계속 농민 봉기가 있었던 점은 우리도 추측해볼 수 있죠.

 

‘봉기’란 한자로 벌 봉, 일어날 기.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백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까? 당시 서민들의 힘든 삶을 대변하는 단어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 이 시기는 서양의 이양선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문을 두드리던 시기이기도 해요. 이양선, 다른 모양의 배를 말하는 한자어죠. 조선에서 보지 못한 모양의 배들이 조선에게 무역을 하자며 수많은 요구를 합니다. 처음으로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한 것은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암허스트 상선이에요. 그러나 조선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이야기하죠. 절대로 외국과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수취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봉기,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침략의 욕구를 드러내는 서양세력이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복잡한 시기에 정권을 장악하며 등장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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