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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색채의 마술사②] "샤갈의 영원한 뮤즈 벨라의 만남"

(연재)꼬리에꼬리를무는예술 - '마르크 샤갈' 편

블루노트 승인 2018.08.20 14:26 의견 0

샤갈은 191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러 그림을 공부하며 종종 고향 근처의 비테프스크에 방문하였습니다. 샤갈은 유대인 의사의 딸인 테아와 사귀고 있었으나 테아의 친구인 벨라 로젠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벨라는 14살이고, 샤갈은 22살이었습니다.

샤갈은 1909년에 검은 장갑을 낀 신부라는 제목으로 벨라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샤갈은 30대에 쓴 자서전에서 그녀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나의 현재와 나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나를 관찰하고 나의 깊은 속마음을 읽어왔던 것 같다.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녀,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

샤갈의 자서전은 1931년 프랑스어로 출간되었습니다.

▲ 산책, 1917~1918, 유채 물감, 163.5x170, 생트페테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2018년 예술의전당에서 영상작업으로 보여준 그림)

부인 벨라를 깃발처럼 들고 있습니다. “나 행복해~ 이렇게 행복해~”라며 깃발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벨라는 샤갈과의 만남을 자전적 이야기 첫 만남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빠들은 랍비에게서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비종교 학교에 입학하리라는 꿈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에서 매년 최우등으로 상급반에 올라가기 때문에, 오빠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한다. 그러니 오빠들 눈에는 내가 아주 행실 바른 소녀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는 이 젊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눈에 빛을 내는 야수처럼 보이니까 기분이 더 나쁜 거야.”

이렇게 벨라는 책에서 샤갈을 만났을 때의 상황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도 적었습니다. 아빠와 산책한 일, 외숙모와 함께 지낸 여름, 부모님과 함께 보낸 휴가 등의 내용들도 실었습니다. 조금 유치한 듯한 글입니다. 반면, 샤갈의 글은 멋이 있습니다.

나는 다리 저편의 먼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바로 옆에는 영원한 장벽인 대지, 무덤이 있다. 여기에 내 영혼이 있다. 여기에서 나를 찾으라. 여기에 내가 있다. 여기에 나의 그림들, 나의 뿌리가 있다. 슬픔, 슬픔이여! 그것이 어머니의 모습이다.”

러시아는 1900년대 초 문화적으로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전통을 추구하는 화가 브루벨이 있는가 하면, 사실주의를 강조했던 쿠스토디에프가 있고,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러시아에 불러일으킨 말레비치 같은 화가, 추상미술을 선보였던 칸딘스키가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샤갈은 고흐 등의 그림의 강렬한 색채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22세였던 샤갈은 1910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유대인 변호사 막심 비나베르의 재정 지원으로 파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유 시간이 있으면 갤러리나 살롱, 그리고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 반 고흐, 르느와르, 피사로, 마티스, 폴 고갱,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들라크루와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했습니다. 특히 샤갈은 고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고갱의 자화상과 내가 그린 것을 비교해 보면 뭔가 상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샤갈은 몽파르나스의 골목 18번지로 거처를 옮겨왔고, 이곳에서 화가 피카소, 말레비치, 수틴과 자주 만났으며,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 아폴리네르와 인간의 조건을 쓴 작가 앙드레 말로와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훗날 앙드레 말로는 스페인 내전 당시 반파시즘을 외치며 의용군으로 전쟁터로 나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지에서(1939)란 책을 냈는데, 그 책에 사용된 15점의 애칭화를 샤갈이 그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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