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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색채의 마술사③] "피카소와 샤갈, 몽파르나스"

(연재)꼬리에꼬리를무는예술 - '마르크 샤갈' 편

블루노트 승인 2018.08.21 12:20 의견 0

샤갈과 피카소(1881~1973)는 파리 시내에서 종종 부딪쳤습니다. 1914년 샤갈은 러시아로 돌아가기 직전에 피카소를 생각한다라는 작품을 남겼으나, 1921년에는 피카소에게 진절머리가 난 샤갈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제작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샤갈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샤갈과 피카소는 발로리스에 있는 도예 작업실에서 자주 만났는데, 어느 날 점심식사를 하다가 서로 언쟁이 벌어졌고, 샤갈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로 둘은 서로 만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지인들은 샤갈이 피카소를 시기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은 버지니아에게 피카소 혹은 마티스는 누가 뭐래도 거장이다. 나는 결코 그들처럼 뛰어난 명성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반면, 피카소는 마티스가 죽은 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화가는 샤갈만 남게 될 거다. 르누아르 이래 샤갈처럼 빛을 잘 이해한 화가는 없다는 확신을 한다고 샤갈을 극찬했습니다.

▲ 목도리를 맨 사람이 피카소이고, 그 옆이 마르크 샤갈이다. (라이프 사진 기자 필립 할스만)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전 세계의 가난한 예술가들은 몽파르나스로 몰려들었습니다.

몽마르트에 있던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도 몽파르나스로 옮겼고, 장 콕토, 시인 에즈라 파운드, 화가이며 다다이즘의 중심적 인물인 라르셀 뒤샹,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소설가 사뮤엘 베켓, 북회귀선을 쓴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 화가 드가, 노인과 바다를 쓴 소설가 헤밍웨이 등 많은 예술가, 사상가들이 모여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장 콕토는 몽파르나스에서 가난은 사치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했지만 젊은 예술가들이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장 콕토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인데 다재다능했습니다. 머리도 무척 좋아서 당시 영향력이 꽤 있던 사람입니다. 흥미롭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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