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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색채의 마술사④] "샤갈의 파리 생활"

(연재)꼬리에꼬리를무는예술 - '마르크 샤갈' 편

블루노트 승인 2018.08.22 10:52 의견 0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샤갈이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린 작품입니다.

샤갈은 입체주의에 때려 부수자라고 말할 만큼 냉소적이었으나, 입체주의 회화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입체주의보다 더 감각적이고 다채로운 것이 특징인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르피즘은 1912년에 기욤 아폴리네르가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을 보고 만든 예술사조로, 색채를 중시하는 시적인 입체주의를 말합니다. 그림을 보면 제목처럼 샤갈은 자신의 손가락을 일곱 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일곱 개나 그렸을까요 샤갈은 한 인터뷰에서 일곱 손가락으로 상식이 파괴된 세계를 의식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샤갈은 파리를 사랑했습니다. 파리를 나의 두 번째 비테프스크”, “나무가 물을 구하듯 나의 예술에는 파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림을 보면 이젤 위에는 비테프스크를, 창 밖에는 에펠탑이 있는 파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 1912~1912, 유채,156x122,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샤갈이 뤼슈 아틀리에로 이사한 후 초기에 그린 그림 중 하나입니다. 제목은 친구이자 시인인 블레즈 상드라르가 지어주었습니다. 상드라르는 자신이 지은 시를 샤갈에게 읽어주곤 했습니다.

수딘, 모딜리아니 등 수많은 미술가들이 무명시절 거처하던 파리 근교의 아틀리에 라 뤼슈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값싼 작업실을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벌집 모양의 목조 건물입니다.

라 뤼슈는 벌집이라는 뜻입니다. 라 뤼슈에는 140개의 작업실이 있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성공을 꿈꾸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예술가뿐 아니라 알코올 중독자, 현실부적응자 등 갈 곳 없는 영혼들에게도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던 장소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같은 러시아 혁명가도 있었는데, 루나차르스키는 1917년 제2차 러시아혁명 이후 샤갈을 페트로그라드 문화부 미술담당관으로 추천했습니다. 물론 벨라의 반대로 그 제안은 거절되었습니다.

라 뤼슈 근처에는 짐승 도살장도 있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명소리, 알코올 중독자들의 싸움소리, 술병 깨지는 소리, 창문을 열면 느껴지는 짐승의 피비린내, 불쾌한 내음들을 감수성 예민한 예술가들은 그대로 아픔으로 그려놓곤 했습니다. 샤갈은 도살장에서 나는 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비테프스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1912년 무렵, 샤갈은 유대인의 종교적인 삶에 관한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자주 사용한 모티프가 기도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샤갈은 1913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6월 허바스 발덴 슈트름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에서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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