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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색채의 마술사⑦] "벨라의 죽음, 샤갈의 죽음"

(연재)꼬리에꼬리를무는예술 - '마르크 샤갈' 편

블루노트 승인 2018.08.25 11:03 의견 0

1939년 샤갈은 카네기 상을 수상했지만,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1941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습니다.

벨라는 그곳에서 갑자기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벨라의 인적사항을 적는데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자 벨라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호텔로 가자고 했습니다. 얼마 전 비버 호수에서 백인 그리스도교도만 환영한다는 표지판을 봤던 벨라는 병원에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벨라의 병은 악화되었고, 194492내 노트를...”이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샤갈은 벨라의 무덤 비석에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는 글을 직접 새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몇 달 동안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제일 먼저 작품 작업을 시작한 것도 벨라의 회상록 노트를 다듬고 삽화를 그려넣는 것이었습니다.

▲ 화촉, 1945, 유채 물감, 120x123, 파리 개인소장


벨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린 그림 중 하나입니다. 원래는 부부가 축제로 이루어진 서커스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던 그림입니다. 샤갈은 그림을 어두운 남색으로 다시 칠하여 슬픔의 축제로 바꾸었습니다.

1945년 딸 이다의 친구인 버지니아 해거드가 가정부로 고용되었으나 곧 샤갈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버지니아는 샤갈과의 아들을 낳았고 1951년 샤갈을 떠나 사진작가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195260세의 샤갈은 딸에게 소개받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둘을 그리스로 여행을 하고, 샤갈은 다시 활력을 찾습니다.

샤갈은 여러 작업에 도전을 했습니다. 1950년에는 도자기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벽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960년대 초 샤갈은 태피스트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샤갈은 1965년에 태피스트리 직조를 시작하여 1968년 마무리하여 이스라엘 국회의사당(크네셋)에 세 점의 대형 태피스트리 헌정식에 참여했습니다.

1966,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1973, 샤갈의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 샤갈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197588세에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들어갈 50점의 석판화를 제작했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석판화를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자신의 집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이후 주변 셍 폴 드 방스의 유대인 묘지에 묻힙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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