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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우리가 그토록 염원했던 4년 전 그 날 - 영화 "터널"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4.07 18:52 의견 0

자동차 영업 대리점에서 일하는 이정수 대리는 차를 타고 집에 가던 중 그만 터널이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그 잔해 안에 매몰되고 맙니다. 그런데 신고를 받은 119는 엉뚱한 짓만 해대고, 현장에 나타난 높으신 분들은 어째 사진을 찍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과연 이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영화 〈터널〉은 개봉 당시 영화 속 상황과 세월호 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운 화제를 몰고 왔던 작품입니다. 영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나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월호 사건과 연관지어줄 것을 종종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볼까요. 안전행정부 장관 역의 김해숙은 첫 등장에서 '그…'등의 군말을 자주 이용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투를 그대로 모사합니다. 이후 중요한 회의 자리에서 '잘 협의해 진행하라', '최선을 다하라'는 알맹이없는 지시를 내리는 모습에서도 우린 어렵지 않게 '그 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죠.


최초 신고시 '터널의 위치를 말하라'는 119신고접수자의 말은 해경이 세월호 사건 최초 신고자에게 위도와 경도를 물은 것을 연상케 하고, 사고 직후 흙더미 속에서 숨을 고르는 정수의 모습은 터널에 매몰된 이라기보다 침몰하는 배의 선실에 갇힌 사람을 묘사하는 듯한 앵글로 촬영됩니다.

사소한 묘사에서도 세월호 사건의 흔적은 발견됩니다. 사고에 대해 '지겹다'고 이야기하는 시민들, 구조를 방해하는 일마저 서슴지 않고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들, '나라 경제'를 근거로 구조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권력자들, 터널 매몰자의 가족들에게 쏟아지는 근거없는 비난들까지. 영화 속 굵직한 사건들 대부분이 세월호 사건과 일대 일로 매칭돼죠.

안타까운 사실은 이것이 영화의 장점이 아닌 한계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맥가이버가 아닌'어느 평범한 사내가 터널에 묻혔다면, 그리고 그에게 생수 두 병과 케이크, 강아지 한 마리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이 주어졌다면 이는 영화적으로 아주 '재미있는'상황이 돼죠. 터널 바깥 사람들에 대한 묘사 없이 이 설정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127시간>같은 영화를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 속 허구를 세월호 사건과 매칭해 이해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터널〉의 연출은 이 '재밌는 상황'을 더 이상 '오락'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세월호 생존자들이 마지막까지 배 안에서 겪었을 사투를 영화적으로 소비하기엔 아직 우리의 상처는 너무나 깊고 해결해야 할 일들도 고스란히 남아있거든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작품이 세월호 사건을 아무리 세심하게 흉내를 내도 당시 한국 국민으로서 느꼈던 분노, 그러니까 비선실세 최순실 씨와의 회의가 있은 후에야 중대본 방문을 결정한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을 위해 마련된 구급 약품 탁자를 치우고 라면을 끓여먹은 어느 장관의 모습, 실종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어느 공무원들과, 단식투쟁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치킨을 시켜먹는 퍼포먼스를 벌인 모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느꼈던 그 날것 그대로의 감정엔 조금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용 없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했어도 관객들은 이야기에서 세월호를 스스로 발견해낼 수 있었을겁니다.영화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남되, 극중 허구의 상황이 가진 '재미'또한 고스란히 보존됐겠죠.

하지만 이런 저런 아쉬움에도 불구,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터널을 헤치고 나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정수의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4년 전 어느 봄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한 장면이었죠. 안타깝게도 현실 속 우린 단 한 명도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남은 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말끔히 정리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날이 어서 오길 바라는 마음을, 여기에 적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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