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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17) - 혼자 머무는 나에게는 좁은 방을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7.28 09:00 의견 0

어느 날 취재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 내 방의 문을 열었더니, 이게 웬일인가

내 방에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한눈에 봐도 노동자거나 농부의 행색인,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에 내가 방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방번호를 확인했더니, 이건 분명 내가 그 날 아침 문을 닫고 나왔던 바로 그 방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 사람들에게 손짓 발짓으로여기는 내 방이다.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일제히 나서서 역시 손짓발짓으로 나에게 뭐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이야기가 될 리 없었다. 나는 결국 밖으로 나와, 내게 싱긋싱긋 웃어주던 그 아주머니, 호텔 메이드를 찾았다.

그 호텔 메이드가 불러서 찾아온 다른 숙소 직원까지 나서서 손짓 발짓과 짧은 영어로 대충 소통해서 내가 이해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당신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골에서 휴가를 위해 모스크바로 올라온 일가족이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당신의 다른 일행들이 모두 귀국해서 당신은 혼자서 넓은 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당연히당신에게 좀더 좁은 방을 주고, 수가 많은 이 가족들에게 당신의 큰 방을 배정한 것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사실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원래는, 방을 옮기더라도 나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식의 절차보다는넓은 방은 많은 수의 가족에게, 혼자 머무는 사람에게는 좁은 방을이라는 원칙이 훨씬 더 분명하고 공정한 원칙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좁은 방으로 옮겨진 것도 언짢은 일이었지만 내게는 더욱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다. 바로 내 짐이었다.

혼자서 넓은 방에서 며칠동안 계속 머물다 보니 나는 짐을 거의 정리하지 않고 숙소 여기저기에 대충 팽개치고 나온 상태였다. 이런저런 기념품과 양담배 심지어 거의 손대지 않은 달러를 넣어둔 가방도 활짝 열어놓고 다녔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기념품 등이야 누가 좀 가져가도 별로 억울할 게 없지만, 달러 현금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난처한 일이었다. 통역료도 그렇고 모스크바에서 당분간 돈 쓸 일이 꽤 많을 텐데

인상을 쓰면서 새로 주어진 방으로 들어가보니 내 짐들은 비교적 잘 꾸려져서 한쪽에 정리돼 있었다. 나는 그 아줌마 호텔메이드에게 잔뜩 인상을 써주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내 가방을 풀어헤쳐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받은 충격의 핵심에는 바로 그 때의 그 느낌이 자리잡고 있다. 정말, 너무 완벽하게 내 짐이 단 하나도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잘 정리돼 있었던 것이다. 열어서 절반쯤 피운 담배갑의 담배도 그대로 (몇 개피 남았는지 세어뒀던 것은 아니지만) 옮겨놓은 것 같았다. 벗어놓은 속옷이나 양말도, 봉지에 잘 넣어져 있었다. 달러는 그대로 있었다. 꽤 두툼한 봉투였고 눈에 띄는 곳에 두었는데, 열어본 흔적은 없었다.

그때의 부끄러운 심정그저 부끄럽다는 말 외에는 내 자신을 뭐라고 형언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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