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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22) - ‘악령’의 메시지가 사회주의 현실 예고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8.12 09:00 의견 0

▲ <악령>의 메시지가 사회주의권이 부닥친 현실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 주동식

리진 선생을 만난 것은 통역인 최 선생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아마 쏘련을 떠나기 하루이틀 전 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쏘련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최 선생에게 통역비를 지불했다. 이제 예정했던 인터뷰 일정은 거의 다 마무리했고, 통역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통역비로 약속했던 금액보다는 얼마 정도 더 얹어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 때문인지 내가 전혀 부탁하지도 않았던 제안을 해온 것이다.

“주 선생, 선생이 꼭 만나보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봤지만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쏘련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고려인 출신 지식인이자 시인이라는 설명이었다. 최 선생이 그에 대해서 말하면서 은연중 드러내는 태도로 봤을 때 리진 선생에 대해 상당한 존경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리진 선생을 만난 곳은 실내가 아닌 어떤 야외 공원의 벤치였다. 희끗한 백발에 금테 안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리진 선생의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인텔리다운 모습이었고 그럼에도 뭔가 색이 바랜 것 같은 인상이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강인하고 신념에 찬 모습같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최 선생은 두 사람을 인사시킨 후 금방 자리를 떴다. 인사를 나누고 리진 선생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용으로 봤을 때 최 선생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은 상태인 것 같았다. 질문과 대화의 내용이 주로 이념적인 데 집중됐던 것이다.

“주 선생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볼쉐비키와 멘쉐비키가 왜 갈라섰는지 아십니까

내가 이 문제를 특별히 파고든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대충 운동권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조직 노선의 이견 때문 아닌가요 특히 당원의 자격 문제를 놓고 갈라선 것으로 압니다. 레닌 등 볼쉐비키는 당원의 자격으로 Δ당비를 내고 Δ당의 특정 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던 반면 멘쉐비키는 그냥 당비를 내는 것만으로도 당원 자격을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내가 알고있는 내용을 별로 확신할 수 없어서 좀 조심스러웠다. 상대는 사회주의 종주국 쏘련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지식인 아닌가. 내가 한국의 운동권에서 줏어들은 상식쪼가리 갖고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리진 선생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니, 주 선생이 그런 내용을 어떻게 다 아십니까 쏘련의 일반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 간부들도 그런 내용 아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리진 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리진 선생으로서는 나를 상대로 사회주의권의 현황이나 문제점을 좀 차분하게 설명을 해볼 생각이었는데, 예상밖의 반응이 나와서 놀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리진 선생은 남한의 운동권이나 반체제 성향 청년들의 생각이나 이념적 수준()을 궁금해 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주고받은 후 리진 선생의 궁금증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남한의 반체제 청년들이 모두 주 선생 정도의 지식 수준을 갖고 있습니까

나로서는 쑥스럽기도 하고 난처한 질문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는 정도를 운동권 청년들이 다 안다고 자신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대충한국의 운동권이라면 대충 나 정도 지식은 갖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답변에 리진 선생은 무척 착잡하다는 표정이었다. 몇번씩 입맛을 다시며남한 수준이 그 정도입니까 쏘련 공산당은 뭐하고 있는지…”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리진 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야말로 리진 선생의 반응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쏘련의 지도층이나 당원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사회주의 종주국인데 그 나라의 당 간부들조차 자신들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리진 선생이 좀 과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진 선생과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이런 의문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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