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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23) - 악령과 악마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8.18 09:00 의견 0

리진 선생의 화제는 문학 쪽으로 이어졌다. 특히 도스토엡스키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리진 선생이 원래 원했던 화제가 이것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인인 그로서는 당연한 태도였을지 모른다. 쏘련이나 현실 사회주의권의 문제도 문학 작품의 관점을 통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리진 선생은쏘련이나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이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혹시 <악마>라는 도스토엡스키 소설을 읽어보셨습니까하고 물어왔다.

악마 나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도스토엡스키를 좋아해서 그의 작품을 꽤 읽었지만 <악마>라는 작품 제목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 하고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그 작품 주인공 이름이 스따브로긴 아닌가요

“맞습니다, 스따브로긴! 그 작품 읽으셨습니까

“네, 읽었습니다. 저도 도스토엡스키 열혈 독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작품 제목을 <악마>가 아닌 <악령(惡靈)>이라고 부릅니다. 굳이 풀이하자면 악한 영혼이라는 의미입니다.”

“악령이라구요 왜 그렇게 부를까 잘 모르겠네요. 원래는 <악마>가 맞습니다.”

나로서는 어느 게 맞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리진 선생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내가 알던 <악령>의 원래 러시아어 제목의 의미가 <악마>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이 대화를 계기로 리진 선생과 나의 대화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어졌다. 문학 그것도 특정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속깊이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리진 선생은 도스토엡스키가 <악령>에서 말하는 메시지가 지금 사회주의권이 부닥치고 있는 현실을 거의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가 <악령>을 읽을 때는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관점이었다. 리진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진 선생은 쏘련의 당 간부들뿐만 아니라 일반 젊은이들도 공부를 하지 않고 특히 문학 작품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쏘련의 부모들이 책을 읽지 않는 자녀들에게 고전 문학을 읽히기 위해서 일부러 타이프로 작품 내용을 쳐서 제본해 읽힌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 얘기는 나도 쏘련 가기 전부터 들은 적이 있지만 사실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쏘련의 문학 작품 검열을 비꼬기 위해 서방측에서 만든 개그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에피소드의 사실 여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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