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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기행(24) - 모국어 개념과 용어들이 너무 낯설다

주동식 칼럼니스트 승인 2018.08.19 09:00 의견 0

▲ 리진 선생이 시집 <해돌이>의 표지. ⓒ 주동식

리진 선생의 개인사도 들을 수 있었다. 선생은 북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소집되어 퇴계원 근방까지 내려왔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고 한다. 일단 후방 지역으로 후송됐다가 나중에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쏘련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북한 당국이 일개 인민군 전사를 위해 그 정도로 배려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만큼 사회주의 국가의 인권 감수성이나 정책이 대단하다고 받아들였는데 리진 선생 본인은 북한 체제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치료를 마친 뒤에는 북한 당국의 배려로 쏘련에 남아서 공부를 했고 공부를 마친 뒤에는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귀국을 거부하고 쏘련에 남았다고 했다. 나는 선생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위험한 결정을 내린 배경이 궁금했다.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북한 당국이나 김일성이 선생님을 상당히 배려해준 것 같은데 꼭 그렇게 귀국을 거부하셔야 했나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일성 집단과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닙니다. 쏘련 지식인들 사이에서 북한 정권이 얼마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지 주 선생은 잘 모르실 겁니다. 동포들이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그 자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선생의 개인적인 소신이야 그렇다 쳐도 북한과 쏘련은 어쨌든 사회주의 우방국가 아닌가 쏘련의 우방국가인 북한 출신 유학생이 귀국을 거부하고도 일신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리진 선생의 답변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북한으로의 귀국을 거부하면서 선생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북한 국적을 박탈당했지만 선생의 개인적 소신에 따라 쏘련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귀국 거부가 김일성 집단 때문이지, 고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쏘련은 무국적자인 리진 선생을 강제로 송환하지도 않았고 자유롭게 취업도 시켜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자녀는 없다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는 않다.

이런 얘기 와중에 들은, 쏘련의 연금 정책도 나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선생은 은퇴 이후에 쏘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고 있는데, 무국적자임에도 연금 수급 자격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쏘련에서 일정 기간 이상 일한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도 쏘련 정부가 연금을 보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를 막 들었던 당시에는역시 사회주의 국가다운 인권의식이라고 감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점점 나이를 먹고 그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그거 쏘련 관리들이 자기 돈 아니라고 막 낭비한 셈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더 기울어졌다는 것은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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