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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뤽 베송의 새로운 여성 캐릭터, <루시>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6.28 08:43 의견 0

여기, '루시'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습니다. 얼굴 예쁘장하고,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가 있으며, 고민이라고 해봐야 다음 주에 있을 시험에 대한 걱정이 고작인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지요.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칩니다. 남자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다 악당 '미스터 장'이 이끄는 마약 밀운반 조직에 붙잡힌 겁니다.

그들은 그녀의 배를 갈라 정체불명의 신종 마약이 담긴 주머니를 심습니다. 그녀를 배송지까지 비행기로 이동시켜 마약을 운반할 계획이죠. 그러나 외부 충격으로 루시가 품고 있던 뱃속의 주머니가 터져버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정체불명의 신종 마약은 혈관을 따라 그녀의 뇌와 신경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일반인 수준에 있던 그녀의 뇌 사용량은 조금씩 상승해 100%에 이르게 됩니다.

'관객'이 아닌 '생물학자'의 눈으로 보는 영화

뇌가 가진 잠재력의 10% 정도밖에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뇌를 100%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호기심도 그만큼 오래된 것이고요. 이 궁금증에서 출발한 영화나 소설은 이미 많습니다. 영화 <루시>가 소재 면에서 신선한 영화는 아니란 얘기죠. 물론 낡은 호기심도 새로운 상상력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시>는 그 호기심에 독창적인 답을 주는 영화도 아닙니다. 뇌 활용도 상승에 따라 그녀가 하나, 둘 발휘하게 되는 능력들은 그냥 누구나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할리우드 식 초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소재와 작화 방식의 구태에도 불구, <루시>는 같은 이야기를 다룬 다른 작품에선 보기 어려운 재미를 줍니다. 비슷한 소재의 다른 작품들은 보통 주인공의 능력치를 100%로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그러나 <루시>의 각본은 다른 길을 갑니다. 주인공 '루시'의 뇌 활용도가 100%를 찍는 순간을 영화의 마지막으로 미루고, 대신 그 100%로 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택한 겁니다.

뇌 능력이 10%씩 올라갈 때마다 없던 능력이 생기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초능력 쇼'를 보러 온 구경꾼이 아닌, '다음엔 저 여자에게 어떤 능력이 생길까'와 같은 생물학자의 눈으로 여주인공을 바라보게 되지요. 각본의 특성을 보여주듯, <루시>와 더불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생성하는 인물은 악당 '미스터 장''도 아니요, 루시와 은근한 애정 구도를 그리는 경찰 '피에르'도 아닌 뇌 과학자 '노먼'입니다. 노먼은 이미 치사량 이상의 약을 복용해버린 그녀에게 해야 할 일을 만들어주지요.

영화의 결말이 허망하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저는 루시가 뇌과학자 노먼으로부터 부탁받은 '그 일'을 멋지게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결말이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우리 인류가 루시가 이룩한 그 그 업적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먼' 이야기를 좀 더 해 볼까요. 보통 이런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 캐릭터는 영화에 과학적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루시>의 과학자 캐릭터 '노먼'은 정반대로 활용됩니다. 그는 현대 의학이 뇌와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사실상 무(無)에 가깝고, 심지어 여태껏 옳다고 믿어온 현대 의·과학의 모든 것들이 다 틀린 것일수도 있음을 고백하는 인물로 등장하지요.

그 덕에 이야기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기성의 과학을 모두 부정해버리니, 뇌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이 머리색깔을 금발에서 흑발로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마술을 부려도 관객들은 '그러려니'하고 극에 몰입하게 됩니다. 영리한 설정입니다.

명불허전 스칼렛 요한슨, 살짝 아쉬운 최민식, 달라진 뤽 베송

배우와 감독들 이야기도 좀 해 볼까요.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아름답고 연기도 잘합니다. 마약 조직에 붙들린 직후 심리적 공황부터, 갓 능력을 얻게 된 후의 짜릿함, 끔찍한 부작용으로 인한 충격과 뇌 활용도에 반비례해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모습까지. 인물의 다양한 변화를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어요.

국내 관객들이 제일 궁금해할 최민식은 언제나처럼 훌륭하지만, 그에게서 <레옹>의 개리 올드먼이 줬던 충격을 기대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맡은 '미스터 장'은 출연 분량은 적지 않으나 이야기상의 비중은 크지 않고, '동양인 악당'캐릭터의 클리셰에서 자유롭지 못한 뻔한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 건 배우들이 아닌 이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뤽 베송입니다. 개인적으로 <루시>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뤽 베송 감독의 신작이라니! 지난 세기, 거장으로 불리며 <레옹>의 마틸다와 <니키타>의 니키타, <제5원소>의 리루 같은 압도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낸 그 아닙니까. 이들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극도로 폭력적인 세계에 버려진, 강인하면서도 유약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 안에 잠재된 모성본능, 보호본능부터 금지된 성적 욕망까지 모조리 일깨우는 강렬한 캐릭터들이죠.

<루시>의 루시도 그런 인물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일단 약이 퍼지고 뇌 사용량이 20%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과 치열하게 겨뤄야 했던 마틸다나 니키타와는 다른 인물인 겁니다. 뤽 베송이 왜 이런 변화를 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루시'역시 아름답고 개성있으며 새로운 뤽 베송의 여성 캐릭터인 것 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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