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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이상국을 향해, <남쪽으로 튀어!>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4.13 09:00 의견 0

영화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한국 영화입니다. '가지지 말고, 배우지 말자'를 가훈으로 못 박은 가장 최해갑을 중심으로, 그의 아내 안봉희와 이들 부부의 세 자녀가 등장해 조용조용한 일상 소극부터 화염병 액션까지 다양한 상황을 그려내지요.

우리가 여지껏 보아 온 임순례 감독의 다른 영화와 달리, 영화의 전반부는 일본 냄새가 상당히 강합니다. 일본 영화의 절제된 음악, 정적인 촬영, 담백한 편집 같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채택하고 있지요. 정서만 그런게 아니라 소재도 그렇습니다. 극중 해갑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지하는 이들의 모임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행동 양식은 명백한 '오타쿠'의 것입니다. 중퇴한 여고생인 해갑의 딸을 흠모하는 학교 담임 선생의 등장도 다분히 일본적이죠. 특히 주요 조연 중의 하나인 '커플 형사'의 극중 기능과 비중은 전적으로 일본 관객의 취향입니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일본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 아니라 한국 배우들을 데리고 찍은 일본 영화래도 믿길 정도에요.

뭐, 그 자체가 뭐가 문제겠습니까. 일본 영화의 삼삼한 정서는 그 나름의 맛이 있고, 그 정서를 채택해 그럴싸한 한국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발상에도 큰 잘못은 없지요.

문제는 그 정서가 제대로 이식이 안 됐다는 겁니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 정적인 정서는 사실 개별 감독이나 작품의 정서가 아니라 그냥 국가 민족적인 정서에요. 그걸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하니까, 일본 영화 특유의 담백한 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돼 버립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음악은 잘 절제돼 있고 편집점도 정확하고, 배우의 연기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 맛이 안 나요.

영화가 정말 힘을 얻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은, 해갑 일가족의 막내딸이 '진짜로' 학교를 자퇴하고 '정말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입니다. '오타쿠'나 '여고 담임'대신 강된장과 호박잎이 등장하고, 뭍에서 영화 감독으로 살면서 기성의 가치와 기준에 대해 저항의 언어를 구사하던 해갑이, 남쪽으로 내려가 농부이자 어부가 되어 자신의 이상국 을 직접 개척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부터 말입니다.

이때부터 이들은 정적인 연기, 정적인 편집 같은 '일본적인 것'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집 지으랴, 집 지키랴, 낚시하고 농사지어 아이들 먹이랴, 너무 바쁘기 때문이지요. (뭍에 있을 땐 '딱히 할일 없다' 소리나 들었던 해갑은, 섬으로 내려가면서부터 '정말 열심히 일한다'소릴 여러번 듣게 됩니다)극에 활기가 생기는 건 두말 할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개척해낸 새로운 보금자리의 모습은 정말 보기에도 부럽습니다. 집 고치고, 생선 굽고, 자장면 만들어 나누어 먹는 이들을 가만 보고 있으면, '저게 사는 거다'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패 국회의원과 용역 깡패가 등장해 극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오히려 힘이 빠집니다. 어떻게 만든 집인데……. 하는 느낌이 드는 거지요. 벌인 이야기를 맺기 위해 반드시필요한장면이었지만, 내내 어디로 튈지 모르게 진행돼 온 이야기가 익히 보아온 갈등 상황과 지극히 당연한 결말을 향하는 모양새라 아무래도 좀 아쉬웠습니다.

더군다나 해갑과 봉희 부부가 택한 방법은 십년 전 용산이나 지금의 강정 주민들이 대안으로 삼을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죠. 나름의 대안을 보여주었다면 작품에 보다 큰 의의가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의 결말은 '이상국 건설'같은 도피도 아니고,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는 현실 세계의 이들이 보고 힘낼만한 결말도 아닙니다. 뭐, 이들 일가족에게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암시가 에필로그에 몇몇 지나가긴 합니다만.

아쉽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영화 <남쪽으로 튀어>

결국 '전반부는 별로요 후반부는 꽤 괜찮은데 결말은 다시 아쉬운 영화'라는 것이 영화 <남쪽으로 튀어> 대한 제 '이십자 평'입니다. 하지만 굳이 좋다, 나쁘다 중 하나로 고르라면 차마 이 영화에 대해 '나쁘다'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극중 표현을 빌리자면) '뼛속까지 빨간' 주인공이 나와, 민간인을 사찰하던 국정원 직원까지 계도시키고, 마침내 부패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나는 쥐새끼다'라는 말을 스스로 뱉도록 만드는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미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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