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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파크] 포르노로서의 〈늑대소년〉

강동희 기자 승인 2018.04.05 09:00 의견 0

<늑대소년> 제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전 다소 무리수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영화계에 전례가 많지 않은 소재를 다루겠다는 결심도 무모해 보였고, 영화가 상업적으로 목표하는 관객층도 너무 한정적이어서 흥행이 어디 되겠나 싶었거든요. 게다가 '늑대소년'을 연기할 배우가 송중기라더군요.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배우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면 과연 몰입이 될까 싶었습니다.

그랬던 <늑대소년>이, 지난 7일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습니다. 개봉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기록입니다. 개봉 전부터 '물건'이란 소문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일을 저지른 겁니다. 이쯤 되니 영화가 '의도한' 관객군이 아닌 저도 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7일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은 바로 그날, '송중기 나오는 영화를 아저씨 혼자 보기로' 결심하고 심야 상영관을 찾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소감부터 말하자면, 재밌었습니다.

물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더군요. 남자 입장에선 보면서 동일시할 만한 등장인물이 하나도 없거든요.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그냥 다 '대상'입니다.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여주인공의 시야와 여성 관객들의 '수요' 안에서 작동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007 영화의 '본드걸'과 비슷한 위치인 겁니다. '늑대소년'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에게 언어 능력이 없는 건 물론 야생에 버려진 채 홀로 자라난 탓에 언어를 습득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지만, 감독 조성희가 그의 언어 습득 능력에 대한 가능성을 계속 보여주면서도 끝내 제대로 된 대사 한 마디 보여주지 않은 것은 그의 주체성을 박탈해 여성 관객의 욕망으로 박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몇 마디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몇 마디 대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늑대소년이 하는 말'이라기보다 '여주인공과 여성 관객들이 듣고 싶은 말'임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본드 걸'의 수동성을 비판하듯 늑대소년의 정치적 불공정성을 비난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화 스스로 동화 같은 질감의 영상이나 애잔한 영화음악 등의 도구를 통해 자기 자신이 '순정만화'임을 인정하고 있거든요. 시에 시적 허용이 있어문법적인 오류가 용인되듯, 좀 너무하다 싶은 설정이 등장해도 관객들은 '순정만화니까' 하면서 보게 됩니다. 이미 알려진 배우가 '늑대소년'을 연기하는 모습도 그냥 순정만화로 봐주니 크게 어색하진 않더군요.


물론 으르렁거리고 짖고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늑대소년에게서 가끔 '송중기 티'가 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송중기의 예쁘장한 외모가 영화를 '순정만화의 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 논란이있었던 송중기의 늑대소년 캐스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인 영화 속 여주인공같은 인물, 철수

송중기가 연기한 늑대소년,'철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일단 그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한 이야기는 빼도록 하죠.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아저씨 눈으로 본 <늑대소년> 감상'이니까요. 대신 '늑대소년' 안에 녹아든 온갖 욕망의 흔적에 대해 한번 짚어볼까 합니다.

'철수'란 아이는 (의도이든 아니든) 과묵하고, 근사한 비밀도 있고, 힘도 세고, 힘이 세기 때문에 여성을 물리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선물로 받은 콩에 물을 주거나 여주인공의 악기 연주에 젖어들 줄도 아는 인물입니다. 아, 외모는 송중기고요. 네. 그냥 꿈 같은 남자예요. 여성 관객들이 바랄 만한 요소를 조각 조각 떼어다 재조립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아저씨 눈엔 성인영화 속 여배우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더군요. 가슴은 큰데 허리는 가늘고 얼굴은 예쁜데 말은 잘 듣고…. 뭐 그런 것 말입니다. 유연석이 연기한 '지태'도 방향만 반대일 뿐 철저히 가공된 인물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는 어디 하나 예쁜 구석이 없습니다. 소녀를 때리기도 하고, 자신과 소녀의 결혼을 기정사실화하는 대사를 의도적으로 내뱉고 다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극에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가 지껄이는 대사를 한 번 보세요. 그는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 집도 내가 사줬고, 네 병원비도 내가 내준다' 말합니다. 그가 아버지가 없는 소녀의 집에 '독재 가부장'의 위치로 들어선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대목이죠. 아, 심지어 눈썹 화장도 못돼 보이게 했더군요.

둘의 대조는 여주인공의 '공간'에 대한 존중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늑대소년은 힘은 세지만 소녀의 "기다려" 한마디면 통제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면 악역 지태는 여주인공의 공간, 나아가 공간으로 상징되는 여주인공의 독립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지요(지태는 무단침입죄로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합니다).

'무리수 순정만화'로 흥행 순항...

영리한 영화 이렇듯 늑대소년이나 지태 같은 남자 등장인물들이 더하고 붙여서 만들어 낸 인물이라면,박보영이 연기한 여주인공은 빼고 덜어내어 만든 백지 같은 인물입니다. 여성 관객들이 자신을 쉽게 투영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형적인 순정만화 여주인공이죠. 그러면서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전형적인 인물도 좋은 각본가와 실력있는 연출자가 잘 다듬으면 생기가 돌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랄까요.

성인물 비유까지 하기는 했으나, 재조립 과정을 통해 탄생한 '여성용 남성' 역시 순정만화의 맥락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기에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전 여기에, 출연배우들 모두 연기를 아주 잘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군요. 백지 여주인공, 재가공된 남자 출연진, 모두 철저히 통제된 인물이지만 종이인형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건 배우의 연기력 덕이 크죠..

조연들도 좋습니다. 남녀 주인공처럼 욕망의 대상'이거나 '동일시의 대상'이 아닌 이 배역들은 대신 통제된 주인공들이 할 수 없는 종류의 연기를 펼치며 극에 활기와 생동감을 더합니다. 소녀의 엄마를 연기한 장영남씨는 언제나처럼 훌륭합니다. 아역들도 재미있고요. 소녀가 사는 집의 이웃들도 모두 인상적인데, 전 묵묵히 철수를 보호해주려다 변을 당한 염소 농장 주인아저씨가 특히 인상깊더군요. 입 무겁고 속 깊은 인물들은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무리수다 싶었던 기획은 어느새 하나의 작품이 되어 흥행 순항을 타고 있고, 영리한 연출로 제한된 관객층마저 부수어가고 있습니다. 뭐든 도전 없이 이루어지는 성과는 없다고들 하지요. <늑대소년>은 한국 영화계에서 누구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던 소재를 과감히 다룬 용기 있는 영화였습니다.

전 영화를 만든 이들 대부분이 젊거나 경력이 많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군요. 감독 조성희는 이 영화로 '전도유망한 단편영화 감독'에서 '성공한 장편 상업영화 감독'이 됐고, 박보영과 송중기 모두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들이죠. 이들의 재능과 용기가 한국 영화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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