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의 인(人)시네마(5)] 존재와 실존 앞에서 - 영화 “남아있는 나날”

칼럼니스트 박지영 | 기사입력 2018/10/15 [10:56]

[박지영의 인(人)시네마(5)] 존재와 실존 앞에서 - 영화 “남아있는 나날”

칼럼니스트 박지영 | 입력 : 2018/10/15 [10:56]

영국의 대귀족 달링턴가를 배경으로 2차 세계대전 전후 격변하는 역사적 사건과 가문의 몰락, 죽음, 변화 등을 충직한 집사의 인생과 함께 그려낸 명작이다. 집사 스티븐슨 역의 안소니 홉킨스와 하녀장 미스 캔튼 역의 엠마 톰슨이 열연했다.

 

▲ <남아있는 나날>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지만 원작은 영국계 일본인 카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로 2017년도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작가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와 친밀한 관계로 가문을 비극으로 이끈 달링턴 경 역으로 제임스 폭스가, 대저택의 새 주인이 되는 미국인 역으로 <수퍼맨>의 크리스토프 리브가 출연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말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기 전의 모습으로 출연한다.

 

스티븐슨과 미스 캔튼의 열정적이지만 절제되고 이성적인 사랑이 섬세한 레이스같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감정조절의 극치를 이루는 그들의 사랑에 하인으로서의 삶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냉정해 보인다기보다 인간적 고뇌와 신중함으로 두 주인공의 의식의 깊이와 마음의 심연이 밀도있게 다가온다.

 

▲ 영화 <남아있는 나날>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1993년 작품으로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최고의 영화로 꼽을 수 이유는 화려한 귀족들과 대비되는 충직한 집사들을 통해 의리와 믿음, 정직, 절제라는 인간의 경지를 작가의 의도대로 보여주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돋보이기 때문이다. 모시는 주인들의 미흡함을 채우는 겸손하고 낮은 자세의 충직한 하인들의 존재감이 영상을 가득 채운다.

 

앤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존재감이 최고로 느껴지는 장면은 둘의 사랑이 영롱한 결정체로 빛나는,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캔튼과 스티븐슨은 실제로 사랑의 본능을 이성으로 이겨내는, 마치 성직자와 같은 인내와 자기조절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화려하고 감각적이고 충동적인 귀족들과의 대비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들의 삶이 고행과 수행을 의미하고 있어 그  사랑의 경지도 남달라 보였다.

 

달링턴가의 종말은 비참했다. 독일나치의 앞잡이로 몰리고 병을 얻은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의 뒤를 이어 미국의 젊은 부호가 저택을 사들인다. (이 장면에서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복선으로 비둘기가 날아간다.) 그러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집사 스티븐슨의 눈빛은 공허하다.

 

영욕의 세월을 영혼없이 지켜보는 충직한 그에게서 우리들은 무엇을 보는가? 책임과 의무,  헌신으로 무장한 쓸쓸한 구도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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