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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3)]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서곡 “라이프치히 월요시위”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1.17 09:43 | 최종 수정 2019.07.20 12:08 의견 0

1989년 9월 4일 월요일 동독의 공업도시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스 교회에서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역사적인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는 9월 25일 8천 명을 돌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월요시위는 드레스덴, 할레, 칼마르크스, 마그데부르크, 아른슈타트, 로스토크, 포츠담, 슈베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개혁, 특히 사회주의통일당 일당 지배의 종식, 여행의 자유, 국가보위부(슈타지)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

1982년 이후 매주 월요일 사람들은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1989년 9월 4일에는 기도 후에 교회 앞 마당에서 이들이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개방된 나라를 위하여” “대량탈주 대신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펼쳤다.

라이프치히 가을 축제 기간 중에 이 도시를 방문한 서독과 외국 기자들의 눈과 카메라 앞에서 민간 복장을 한 국가보위부 요원이 현수막을 빼앗았다(독일정치교육센터: Bundeszentrale fur politische Bildung).

그 전 해인 1988년 1월 17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에 대한 추모식에서는 “자유란 항상 달리 생각하는 자의 자유이다(Freiheit ist immer nur Freiheit des anders Denkenden: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구호 아래 데모를 벌이려고 하는 시위군중이 합류하자, 슈타지가 서방 언론 카메라 앞에서 100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동독국적법 그룹(Gruppe Staatsburgerschaftsrecht der DDR) 소속이었다.

이에 전국에서 수천 명이 항의 시위에 나섰다. 당국은 2월 2일에 구금된 사람들을 출국시켜 사태를 수습하였다. 10월에는 동독 보안당국의 교회신문 검열에 항의하는 200여 명의 시위자를 난폭하게 해산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1989년 9월에 본격적인 가두 시위가 나오게 된 것이다.

교회가 월요시위의 중심이 된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 분단 이후 동독정권의 교회 탄압으로 신도 수가 대폭 줄기는 했으나 1989년 동독 전체인구의 24.8%가 개신교, 5.6%가 천주교여서 동·서독 교회 간에 활발한 교류가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교회의 지원은 동독 교회의 활동을 활성화하고 동독 교회가 동독 민주화혁명의 근거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독 교회는 1957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 교회 및 부속시설에서 직접 사용할 23억 마르크(1조 3,800억 원) 상당의 물품과 동독 교회가 현금화하여 사용할 28억 마르크(1조 6,800억 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하여 동독 교회가 목회자의 급여 지급, 교회 및 부속시설의 유지에 충당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지원으로 동독 교회는 76개의 부속병원(12,000개 병상), 양로원, 간호병원, 직업훈련소, 유치원 등 복지시설을 운영하여 동독주민들의 고통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동독 교회의 이러한 역할은 동독 교회가 체제저항 세력 양성의 중심이 되고 동독 민주화혁명이 폭력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서독 교회의 동독 교회 지원사업 경비의 50%는 서독정부가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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