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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6)] 장벽 붕괴 전후의 동·서독과 국제사회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1.31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4 의견 0

1989년 6월 폴란드공화국, 10월 헝가리공화국이 탄생하고 동독 주민이 세를 모으면서 동유럽 민주혁명의 불이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이런 물결이 독일 통일, 유럽 공산블록의 붕괴와 냉전체제 해체로 발전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독 정치의 거목인 빌리 브란트 사민당 당수가 1989년 10월 17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를 만났을 때 “재통일이란 과거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첫째 불가능하고, 우리의 목표도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1972년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 신독일정책의 결실인 동서독 기본조약이 효력을 발한 지 17년이 된 1989년 동서독 관계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교류와 협력이 정상궤도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더구나 동서독 기본조약 6조의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은 각국의 주권이 각국의 영토 내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양국의 국내 및 대외 문제에 관해서 상대방의 독립과 자주성을 존중한다”는 규정에 따라 서독은 동독의 소요 등에 관여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다.

참고로 동방정책은 당시 서독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정책을 말하며, 독일정책은 동독정책을 말한다.

1987년 9월 7일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동독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였다. 호네커 서기장과 콜 총리는 “독일 땅에서 절대로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민족 문제를 포함하여 기본조약 정신에 따라 평등을 바탕으로 정상적인 선린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호네커 귀국 후 사회주의통일당은 “이 방문은 기본조약 체결 후 양국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주권국가 수반에 대한 의전에 따라 두 개의 독일 국가의 독립과 대등한 지위를 세계에 알렸으며, 국제법에 따른 양국 관계의 성격과 양국의 주권을 강조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콜 총리는 ‘법적 지위’와 ‘민족 통일’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브리핑을 통하여 설명했다.

사민당은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1986년 3월 사민당의 기본가치위원회(Grundwertekommission)와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사회과학연구소(Akademie fur Gesellschaftwissenschaften)가 사민당 측에서 에플러, 뢰벤탈 등이 참여한 공동실무팀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4차례 회담을 가진 후에 1987년 8월 <이념 투쟁과 공동안보(Der Streit der Ideologien und die Gemeinsame Sicherheit)>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바탕을 둔 동독의 민주주의가 서로 주장하는 각 체제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 틀 안에서 핵무기 폐기와 군축에 의한 유럽평화질서 구축을 위하여 동독과 서독 양 체제가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공존 속에서 체제경쟁을 하자’는 내용이다. 사민당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40주년 기념식에 축하 사절도 파견하였다.

사민당은 여기에서 더 나가서 폴란드공산당(폴란드통일노동당: PVAP)과 ‘유럽의 평화와 군축’(Frieden und Abrustung in Europa) 공동작업팀(gemeinsame Arbeitsgruppe SPDPVAP)을 구성하여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지던 1989년 6월 27일 본에서 작업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본 연재는 인터넷신문 <제3의길>에 기고된 "독일 통일의 경험"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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