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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4)] 한국인 룸메이트 동생들과의 첫 만남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1.31 11:57 의견 0

"언니 잇몸에 매연 끼니까 너무 웃기지 마요."

"응, 미안..."

망할 바기오 시티 공기 때문에 길에서는 대화도 자제하게 된다. 언제 차들이 지나가며 배기가스를 뿜어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고 새로 들어올 룸메이트 두 명은 한국인이었고 나보다 동생들이었다. 마침 매일매일 똑같이 하는 공부에 질려가던 터라 소소한 재미를 위해 몰래카메라를 준비했다. 바로 외국인인 척 하기. 언니는 중국인, 나는 일본인으로.

기획할 때는 재밌겠다며 깔깔거렸지만 시작부터 뭔가 어정쩡했다. 새로운 친구들이 온 시간이 유일하게 낮잠을 잘 수 있는 주말 새벽이었던 것이다. 나랑 언니가 깰까봐 조용히 침대에 쭈그리고 목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대화를 나누는 둘을 반겨주지 못하고 졸음에 취해있었다. 중간에 “Hello. I’m Rachel. I’m Japanese”라고 간신히 인사만 했더랬지.

숙면 후 정신이 말짱해지니 아차 싶었다. 이거를 어떻게 끝낸담. 늘 일을 벌이기는 좋아하나 마무리를 못 짓는 나다. 심리테스트나 성격 테스트를 할 때마다 나오는 이 결과들이 몰래카메라를 할 때도 나올 줄이야.

내가 일본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들은 서로에게 영어를 떠넘기며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네이티브 코리안 스피커인 나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도 잘 들렸고 입술을 앙다물고 웃음을 참아야하는 고통은 생각보다 참기 힘들었다.

이쯤 되니 헷갈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몰래카메라인가.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갑작스러운 내 유창한 한국말에 둘은 토끼눈이 되었다.

"저희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우,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네."

내가 깔깔 웃자 드디어 상황파악이 된 둘도 따라 웃었다.

“아, 뭐야 한국인이었어요”

긴장이 풀린 우리는 더 편한 모습으로 서로에게도 매우 편한 한국어로 인사를 나눴다. 새벽에 우리 눈치 보느라고 제대로 짐도 못 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자버린 것에 대한 사과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알까. 그게 두고두고 미안한 일로 남아 늘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는 걸. 그 작은 배려가 참 예쁘고 고마워서 낯가림이 심한 내가 평소보다 일찍 마음의 문이 열었다는 걸. 배려의 순간은 찰나였으나 감동은 길었다. 그들과 함께한 기숙사 생활은 훨씬 더 재밌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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