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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8)] 의식주가 통하다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2.03 10:00 의견 0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주는 이상한 법이 있어서 No casino on the land of Illinois, 즉 일리노이의 ‘땅’ 위엔 카지노가 못 들어서게 돼 있다. 그래서 너비가 좀 되는 강 한복판에 파일을 박고 카지노를 만들었는데 이 양반이 매주 하루나 이틀은 꼬박꼬박 거기서 밤을 새는 게 아닌가. 아침에 눈이 벌개져서 들어와 출근하고 취재를 핑계로 나가서 쪽잠으로 하루를 버텼다.

이 정도가 되면 사실 정성이 아니라 집착이고 중독이다. 허리띠 졸라매다못해 궁상을 떨면서, 때로는 남에게 민폐까지 끼쳐가며 돈을 모으면 뭐하나. 변호사비 아낀다고 영주권 수속도 본인이 여기저기 물어물어 알아서 다 했지만 그 노력은 고스란히 카지노와 일리노이주의 수익금이 됐을 뿐이다.

암튼 이런 전차로 이 양반은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고 페이첵이 나오는 2주마다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해결하는, 말 그대로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이었다. 이제 막 알바에서 정규직이 된 내 친구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인 것은 마찬가지. 한국이었으면 무려 정규직 엣헴엣헴 양반 행세를 했겠으나 상놈들이 모여사는 미국에선 알바나 정규직이나 별차이도 없고 어떤 때는 차라리 알바가 나은 경우도 많이 있다.

잔소리쟁이 고모집에서 나와 고단한 몸을 뉘일 쪽방을 찾고 있었지만 미국이 또 어떤 나란가. 요새 페북에서 많이 보이는 패션 신자유주의자분들이라면 기함해 마지않을, 각종 쓰잘데기 없는 규제와 세입자 보호법이 적폐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몹쓸 나라다. 남는 공간이 있다고 세를 줄 수도 없고 세입자 역시 아무 데서나 살면 안 된다.

다운타운이나 인기가 많은 업타운, 하다못해 교통이 편리한 시카고시 외곽도 아닌 멀리 서버브 지역인데도 방 한칸 빌리려면 2006년 당시 최소 한 달 500달러는 줘야했다. 그것도 집 사놓고 계좌 빵구날까 허덕이는 못돼쳐먹은 한인 영감네 방 하나 빌리는 비용이지 진짜 아파트 스튜디오를 빌리려면 가격이 적어도 700달러는 됐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에 시달리던 그 둘은 같은 교회를 다니다 절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았는지 갑자기 은혜 충만하게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지만 동성애나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과부 사정은 홀애비가 안다고 눈빛만 봐도 몸이 아니 마음이 아니 의식주가 통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느 페친분도 썼듯 동성애와 HIV를 응원, 아니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잡설이 길었는데 둘은 싸구려 방을 찾다찾다 결국 어떤 한국 사람의 방 2개짜리 지하실로 들어가게 됐다. 임대법상 지하실은 렌트를 줄 수 없으나 피차 이해가 맞아 계약서 같은 것도 없이 그냥 입주한 것이었다. 집주인은 노모를 봉양하고 식솔을 거느린 40초반의 아재였는데 당시 다른 많은 한인들처럼 서브프라임 직전 부동산 광풍에 몸을 맡긴 채 능력 이상의 집을 덜컥 샀던 용자였다. 그 바람에 월초마다 자기 은행에서 바운스가 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날짜가 되기도 전에 렌트비를 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곤 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겨울에는 시원하게, 여름에는 따뜻하게 지내자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해서 나중 일이지만 나와 친구는 기나긴 시카고의 겨울밤을 가스불을 켜놓고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안 죽은 게 다행이지만 그땐 시멘트 바닥 히터도 안 들어오는 지하실에서 손발이 너무 시려워 어쩔 수 없었다. 군대 혹한기 훈련할 때 침낭에서 자다 기상해보면 유일하게 밖으로 나온 부분인 코가 얼어있었는데, 시카고 한인 자연주의자네 집 지하실은 아무래도 실내여서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침마다 얼굴도 시렵고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여차저차 그 둘은 살 곳을 구했고 한동안 알콩달콩 신혼 아니 신접살림 아니 룸메가 되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으나 기자의 노름벽 때문에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두달 어떻게 긁어모아 렌트를 낸 게 전부고 그 뒤로는 감감무소식. 집 들어가기 전에 내는 보증금도 친구가 냈는데 렌트비의 절반을 계속 받지 못하니 회계조무사의 월급 가지고는 많이 힘든 상황이었다.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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