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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8)] "우리가 인민이다!"에서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2.07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5 의견 0

18년 철권 통치자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를 퇴진시키고(명예) 그의 사상적 아들이자 그보다 25세 연하인 에곤 크렌츠(Egon Krenz)를 서기장으로 선출하고, 정치국의 경제 담당 비서를 포함하여 정치국 물갈이를 하였다.

그러나 크렌츠는 1989년 5월 7일 지방선거의 부정선거 책임자였다. “우리 노동자, 농민 국가의 40년의 지방선거는 독일민주공화국 국민전선 후보자명부를 인상적으로 지지한 선거”였으며 98.95%가 민족전선 단일후보자명부에 투표했다고 발표했다.

이 부정선거로 수십만명이 가두 시위에 나섰고, 사회주의통일당 간부들이 개혁 토론에 참가했다. 크렌츠는 또 그 해 6월 베이징 천안문 대학살을 ‘단순한 질서회복 행위’라고 옹호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내세우는 것은 평화의 질서회복 뿐이었다.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동독 지도부는 혁명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 시민에 대하여 대증적으로 대응하였다. 혁명적 개혁이 아닌 부분적인 대응으로 나섰던 것이다. 결국 이런 대응이 1989년 11월 9일 장벽 붕괴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나오는 사태의 급변을 야기하였다.

11월 9일 정치국 회의 후 오후 6시 57분 사회주의통일당 신임 공보 담당 비서 귄터 샤보프스키(Gunter Schabowski)가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동독 시민은 즉시 어떤 문제도 없이, 친척이 없고 사유도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서독으로 여행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발표 후 3시간이 지나서야 동독 시민들은 이 뉴스가 사실이라고 믿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저녁 시민들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개방하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다음 날 새벽 동독 국경경비대가 장벽을 봉쇄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후의 사태 발전은 그 속도와 깊이 그리고 폭에서 동독과 서독 정부나 국제사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드디어 12월 13일에는 동독 주민의 구호가 “우리가 인민이다!”에서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 “독일, 하나의 조국!”(Deutschland, einig Vaterland!) 으로 바뀌면서 조기 통일로 달려나가게 된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본 연재는 인터넷신문 <제3의길>에 기고된 "독일 통일의 경험"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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