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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9)] 독일! 독일!”(Deutschalnd! Deutschalnad!)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2.11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5 의견 0

장벽 붕괴 전후까지도 국제사회, 특히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에 관한 최종결정권을 보유’하고 있는 2차대전 전승 4강국 즉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역시 통일은 물론이고 당시 독일 분단 상황의 변경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고르바초프 서기장 체제의 소련은 동독의 종주국이지만 경제적으로 엉망진창이 된 소련 자신의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었다. 따라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유럽 진영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필요하면 일정한 정도 개입하면서 공산 블록 내 문제로 일정한 타협에 의한 안정을 원하고 있었다.

동독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가 선출되는 과정에도 드러났다. 장벽이 무너진 11월 23일 동독 인민의회에서 모드로브는 빌리 슈토프 후임으로 각료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 이틀 전에 소련 외교관이 10월 혁명 기념 리셉션에서 드레스덴 출신이 새로운 정부 수반이 될 것임을 발표했던 것이다.

동독의 체제 유지, 동유럽 블록의 안정화를 위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소련의 노력은 동독 주민의 혁명적 개혁 요구에 응하지 못하고 여기에 동독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12월 19일 콜 총리와 드레스덴에서 만났을 때 모드로브 의장이 150억 마르크의 지원을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였다. 이듬해 3월 동독 정부의 재정파탄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처럼 동독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대중시위 참가자는 늘어갔다. 12월 11일 라이프치히에서는 3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제 이들은 독일을 상징하는 적-흑-금 색의 기를 들고 “독일! 독일!”(Deutschalnd! Deutschalnad!)를 외쳤다. 이 날 라이프치이 폴크차이퉁(Leipziger Volkszeitung)의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 인구 54만7천 명 중 대략 4분의 3이 재통일을 원했다. 이제 동독 주민은 본격적으로 통일을 요구하고 나섰다. 동독 내부 문제는 동독 정부의 손을 떠났다. 서독과 국제사회가 나설 차례였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본 연재는 인터넷신문 <제3의길>에 기고된 "독일 통일의 경험"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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