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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소란한 아픔 - 연극 '고독한 목욕'

박앵무 기자 승인 2019.03.12 15:56 의견 0

▲ 연극 '고독한 목욕' 공연사진 ⓒ 국립극단

인혁당 사건의 아픔을 담은 연극 <고독한 목욕>이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개막했다.

연극 <고독한 목욕>은 196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인혁당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며, 2018년 국립극단의 신진 작가 발굴 프로젝트인 ‘희곡 우체통’에서 낭독극으로 선정되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에 벌어졌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북한의 명령을 받은 지하 대규모 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박정희의 유신반대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었다고 하며 불거진 사건이다.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 사건을 빌미로 당시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긴급 체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재건위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진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고, 판결 18시간 만에 기습 사형을 진행해 논란이 되었다.

연극 <고독한 목욕>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가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흘러간다. 암전된 무대에 잔잔한 조명이 들어오며 욕조 속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손이 등장한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아버지가 잡혀간 이후 삶이 두려워진 아들은 욕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꿈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상황 속에 아버지를 만나 대화하며 극이 진행된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짊어진 아들의 마음은 대사를 내뱉는 숨결 속에서 느껴진다. 아버지가 빨갱이라 오해받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처연함까지 느껴진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사를 반복해서 내뱉는다. 빨갱이는 뭔지, 아버지는 뭐하던 사람인지, 사건은 무엇인지 계속된 질문의 굴레에 쌓이지만, 극의 말미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선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게 된다. 또한 아버지를 마주하며 자신이 지닌 내면의 고통과 화해하게 된다.

공연의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준 것은 무대였다. 가운데에 커다란 욕조를 두고 양쪽 옆 벽에 문을 2개씩 배치했으며 무대의 뒤에 커다란 문을 두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분리했다. 벽에 달려있는 문과 창문은 주인공이 세상과 통하는 통로이자 아버지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두 가지 의미를 잘 살려주고 있다.

조명 역시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으로 연출해 묵직하면서 암울한 분위기를 잘 드러냈다.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빨간 조명을, 취조 장면에서는 핀 조명을 적절히 배치해 당시 취조실을 관객석에서 바라보는 착각을 일게 했다.

욕조는 내면에 갇힌 아들의 공간이자 아버지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공간으로 이용된다. 목욕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겉에 걸친 모든 것을 벗어야 한다. 욕조는 아들의 내면 속 고통을 처절히 드러내며 아버지의 속내까지 이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다 담아낸다.

작품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일상적인 키워드들을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으며 수미쌍관으로 마무리된다.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지만 아주 일상적인 것들을 향유하는 것조차 사치였던 시대를 대변하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아픔과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의 어려운 모습들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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