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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리카(大?FREE?KA)’ (3)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44)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3.29 15:27 의견 0

그렇다면 현대의 해법은 무엇인가

질 들뢰즈는 ‘노마디즘’을 말했다. 노마디즘은 디지털 유목민을 꿈꾸고,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울린다. 그러나 개인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삶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유를 소극적으로만 누릴 때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도 있다.

토크빌은 자유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자유만이 시민을 서로 접촉하도록 하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서로 상의하고 토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론’에서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를 언급하면서 후자에 손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선 존 스튜어트 밀은 역시 ‘자유론’에서 자유는 조건이 갖춰진 개인이 누려야 한다고 했다. 자유와 관련한 역사적 논의를 계속 진행하는 동안 정치와 관련한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로 귀결했다. 그동안의 자유가 대부분 ‘벗어날 자유’(free from)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행동할 자유로 등장한다.

이러한 자유는 어색하다. ‘벗어나는 자유'의 이해는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그동안 들어왔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할 자유’를 이해하고 획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동할 자유는 개인을 벗어나 공동체에서 다뤄야 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마디즘은 지난 시절의 유물이다. 공동체를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공동체를 생각하면, 노마디즘은 개인에 귀속한다. 따라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기독교 언어에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단어가 있다. 커뮤니티(community), 즉 공동체를 의미한다. 현재 출간한 경영, 정치, 자기계발, 인문학 등 다양한 책들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어울림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대구의 정치는 정치적 다름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치적 ‘큰’ 코이노니아를 형성해야 한다.

‘늦어서 고마워’에서는 에드먼드 버크의 ‘작은 집단들’을 공동체 모델로 제안하고 있는데, 큰 코이노니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큰 대구’와 관련한 필자의 바람인데, ‘큰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앞에서 싱가포르와 대구를 비교했는데, 가장 부러운 요소가 열린 마음, 즉 개방성 이었다. 유능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 국적이나, 성별 등을 따지지 않는 싱가포르의 적극적인 자세는 대구가 대한민국과 세계를 대상으로 가져야 할 큰마음이다.

같은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대구의 현실은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물론 쉽지 않다. 그래도 변화해야 한다). 우선, 다른 지역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다원주의를 긍정적으로 수긍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지방분권 시대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폐쇄적인 성향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대구 발전의 적폐이다.

다원주의는 단순히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참여를 말한다. 물론, 다양성은 긴장 관계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시민이 한데 어우러져 크고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해결하는 집단은 수많은 사람이 이동하는 21세기에는 이점이 될 수 있다.

‘늦어서 고마워’에서는 서로 다른 성, 이념, 인종, 민족을 포용하는 다원주의 국가는 혁신적인 나라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 타이완, 일본, 중국도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갖는다면 다원주의의 과실을 누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참고로 2012년 카우프만 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 중 4분의 1이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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