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4.19-59주년(2)]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과 저항하는 시민들

2.28 민주학생의거부터 4.11 제 2차 마산의거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4.22 15:22 | 최종 수정 2020.04.20 03:01 의견 0

4.19 혁명은 단순히 4월 19일 하루 만에 발발한 사건이 아닙니다. 2.28 민주학생의거, 3.15 마산의거를 필두로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 것이죠. 4월 19일 전국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고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시위대가 줄을 이었습니다.

1960년 5월은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자유당에서 등장한 강력한 대통령 후보는 여전히 이승만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정부가 수립된 이후 12년간 집권을 지속해왔습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전쟁을 치르면서 그가 보여준 정치적 태도는 시민들의 마음을 잃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책 실패와 독재가 계속됐기 때문이죠.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부와 여당은 야당의 선거운동을 철저하게 방해했습니다.

▲ 왼쪽부터 조병옥, 이기붕, 장면의 모습. 당대 정치인으로 1960년 5월 선거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 위키백과


1960년 2월 28일은 대구에서 장면의 유세일 이었습니다. 장면은 당시 야당의 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자유당은 부통령이 자유당에서 당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장면의 연설을 듣기 위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학생들의 등교를 강요합니다.

학생들은 이에 부당함을 느끼고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며 시위합니다. 대구에서 일어난 이 시위는 대구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에 다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3월 1일은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은 대전에서, 12일은 부산, 13일은 서울에서 시위가 일어나며 이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의 구호 역시 시위가 계속되면서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띤 구호를 외치며 부정선거를 비판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지속되었지만 중앙정부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60년 열릴 대통령과 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을 기회로 삼아 5월에 일어날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에 치르게 됩니다.

▲ 1960년 3월 15일 선거를 앞두고 붙은 벽보 포스터. ⓒ 위키백과


그러나 조병옥은 병을 치료하러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된 2월 25일 죽음을 맞이합니다. 국민들은 조병옥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조병옥이 이승만을 꺾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위인으로 꼽혔기 때문이죠.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문제는 장면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두고 벌어졌습니다. 자유당은 장면의 대통령 당선을 방지하기 위해 야당 선거원들을 체포하고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행동은 실제 선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공무원을 총동원해 선거 결과를 조작하죠.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4할 사전투표(事前投票), 3인조에 의한 반공개(半公開) 투표, 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 선거결과로 등장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루고 있다. ⓒ 위키백과


3월 17일 정부는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했습니다만 국민들은 발표된 결과를 불신 했습니다. 왜냐면 형식만 선거였을 뿐이지, 선거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자유 탄압이었기 때문이죠.

3.15 부정선거를 알게 된 국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죠. 중앙정부에서는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강제 해산시키려 노력했죠. 경찰은 발포와 동시에 시위에 가담한 인사들을 체포하고 구금했습니다. 경찰과 정치폭력배들이 무리하게 제지하면서 사상자, 행방불명자등이 속출했습니다. 이에 정부를 끼고 여러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고, 마산시민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김주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되었다. 이사건으로 4월 11일 마산에서는 다시 한 번 큰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 위키백과


이에 중앙정부는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을 마산사건의 책임자로 내세워 두 사람을 사임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내무부장관 홍진기를 교체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민심이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4월 11일에 바다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됩니다. 시체의 신원은 3·15 마산 의거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었습니다. 국가는 시체를 부검한다고 했지만 검시의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있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16살 마산상고를 다녔던 김주열은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김주열의 죽음은 온 시민들의 분노를 들끓게 했습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부수고 수류탄 1~3개를 훔쳐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했습니다. 시민과 학생들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