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 윤 박사 "3.1운동의 중심에는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천도교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특집(3)] 손 윤 박사 인터뷰

김혜령 기자 | 기사입력 2019/05/10 [18:27]

(인터뷰) 손 윤 박사 "3.1운동의 중심에는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천도교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특집(3)] 손 윤 박사 인터뷰

김혜령 기자 | 입력 : 2019/05/10 [18:27]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뜻깊은 해입니다. 첫 기념일인 5월 11일을 앞두고 시사N라이프는 뜻깊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동학을 이은 천도교 지도자로 알려진 의암 손병희 선생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그 뜻을 계승하고 있는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이며 <동학민족통일회> 의장이신 손 윤 박사님입니다.

 

천도교는 1905년 동학을 명맥을 잇기 위해서 새롭게 개칭한 종교입니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동학의 교리를 체계화 하면서 유교, 불교, 선교의 사상을 통합하려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동학의 명맥을 이은 천도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손병희는 독립운동가로도 많은 활동을 전개했으며 천도교의 3대 교조로서 동학과 맥을 잇고 천도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조선 전국의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된 문물을 수입해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3.1운동의 주축세력이었던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동학민족통일회> 의장 손 윤 박사.     ©이정환 기자

 

¶ 3.1운동의 중심에는 손병희가 있었다

 

▶ 일반적으로 손병희 선생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손 윤: 3.1운동 당시 손병희는 이미 민족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구, 이승만도 손병희보다 15살이 어린 나이의 청년들이었죠. 손병희는 동학의 북접대도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인물로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김구, 이승만 같은 청년운동가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였죠. 

 

▶ 기독교 계통의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국외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며 3.1운동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본지 기사 <여운형,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만들다> http://sisa-n.com/26988 참조) 당시 천도교는 3.1운동을 위해서 어떤 활동들을 전개했나요?

 

☞손 윤: 1905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천도교의 포교활동에 힘쓰면서 동시에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으로 보내 시야를 넓히고 인재를 양성합니다. 학교도 만들어 교육에도 앞장섭니다. 언론과 출판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귀국한 다음해 1906년 <만세보>를 창간해 <일진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보문관>과 <보성사>를 설립해 인쇄와 출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찍어낸 인쇄소인데,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분을 속이고 일본으로 피신을 가 있는 동안, 성능이 좋은 등사기를 발견합니다. 손병희는 이 등사기를 국내로 들여와 전국의 천도교 교당에 몰래 숨겨둡니다. 사람들은 왜 그 비싼 것을 사들이냐고 이야기 했습니다. 게다가 <보성사>는 적자가 너무 심해서 폐쇄하자고 건의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손병희 선생은 “앞으로 긴히 쓸 곳이 있다”고만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빠르게 배포되고,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등사기 덕분이었습니다. 경성에서만 출판물을 찍어 배포했다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만세운동을 해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죠. 하지만 전국 주요 지역에서 등사기로 인쇄를 할 수 있다면 가능해 집니다. 이렇게 손병희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써가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또한 당시의 천도교는 약 300만 명의 신도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교세를 갖고 있었고, 각지에 교당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왼쪽부터 손병희의 모습, 탑골공원에 있는 손병희동상의 모습. 손병희는 어린 시절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전수받았으며 동학농민혁명시기에 대접주로 활동했다. 최시형의 죽음 이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을 포교하고 체계화 하는 데 힘썼다. 교육 사업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 위키백과


▶ 민족종교의 선두주자로서 천도교가 3.1운동에 앞장 선 것은 당연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입니다.

 

☞손 윤: 손병희는 1898년 최시형이 지금의 단성사 앞에서 처형당했을 때, 독립운동에 대한 결의를 다집니다. 그때부터 1919년의 만세운동 전까지 약 25년간 동학교도들을 모아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동학을 기독교나 불교처럼 동학을 체계적인 형태로 만들면 하나의 종교로 인정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손병희가 천도교로 바꾼 것이지요.

 

사실 동학은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으로 전국 각지에서 혁명을 주도한 사상입니다. 당연히 동학을 이어받은 천도교가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동학의 대접주였던 손병희가 제3대 교조로 이어지면서 천도교로 개창했기 때문에 동학과 천도교는 그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동학'의 정신을 기려야 한다

 

▶ 어떤 이유로 동학이 천도교로 개창하게 된 건가요?

 

☞손 윤: 손병희는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총명한 인재였으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치를 수 없게 되자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 최시형의 눈에 들어 종교적 수양을 쌓으며 동학의 차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닦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때에는 북접대도주를 맡으며 혁명을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전라도 중심의 동학군은 몰락하고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동학군은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손병희는 북쪽 지방으로 넘어가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위험인물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손병희는 일본으로 피신해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갑니다.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진보회>를 통해 흩어져있던 동학군을 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손병희의 오른팔이었던 이용구가 배신하며 <일진회>를 설립해 <진보회>의 핵심인물들을 포섭해 친일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시천교>라는 동학과 유사한 새로운 종교단체가 결성되면서 동학의 신도와 재산들을 모두 빼앗기는 일마저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던 손병희는 일본에서 귀국했고 천도교로 명칭을 바꿉니다. 천도교는 곧 동학입니다.

 

▲ 손 윤 박사는 국내 몇 안 되는 손병희 연구자로 다양한 사료를 수집했다. 손병희의 저서 <준비시대>를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이정환 기자

 

▶ 올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갖는 의미가 클 것 같은데요. 혹시 일반대중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손 윤: 동학농민혁명을 국가적으로 기린다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지만, 자칫 황토현전투 전승일을 기념일로 하게 되면서 더 큰 동학의 업적과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봐 우려가 되는 점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동학의 의미가 축소, 폄하되었고, 분단을 겪으며 남북한 모두 정치적 언어로 동학을 표현하며 놓친 점이 많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에서는 <동학농민운동>, 북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라 불렀는데, 둘 다 ‘동학’과 ‘농민’이 들어갔어도 접근하는 지점이 서로 달랐습니다. 남측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을, 북측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농민’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단순히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1893년 3월에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이라는 이념을 걸고 보은에서 집회를 개최하며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시형 선생이 동학의 모든 접주들을 모았고 당시 모였던 접주들에게 미리 지령을 내렸고 혁명을 선포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역사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의 난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하지만 동학의 신앙인에는 지식인층이 많았습니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결집해 일어났던 혁명인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힘이 컸고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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