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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재미있는 동학혁명이야기(4)] 녹두장군과 말목장터 그리고 감나무

이정환 기자 승인 2019.05.20 10:12 의견 0

▲ 지난 3월 15일에 열린 고부 봉기 재현 행사 ⓒ 이정환 기자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사람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곳을 이사 다니며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키가 작아 '녹두'라 불렸고 그 때문에 녹두장군이 되었다.

삼십 대에 그는 서울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 한다. 모두 무엇인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뿐인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그에게 대원군은 "무슨 부탁이 있어서 왔느냐"고 물었고 "오직 저는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대원군은 이 비범한 청년과의 대화 중에 강(江)이라는 글자를 써 주었다. "네가 일어나서 한강까지만 와라. 그러면 내가 호응해 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의 농민군은 한강까지 진격하지도 못했고 일본군에 잡혀 가서도 흥선대원군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지난 3월 15일에 열린 고부 봉기 재현 행사 ⓒ 이정환 기자

그는 1890년경 동학에 입교했으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2대 교주 최시형에게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동진강이 흘러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던 고부 들녘은 호남의 대표적인 곡창이다. 당시 서울 사람들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자식 하나 잘 길러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었다. 그 소원을 이뤄 조병갑은 1892년 1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수세를 더 걷기 위해 동진강의 탈 없는 보(湺)를 놔두고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하나 더 쌓았다. 그 명목으로 700석의 수세를 거두었다.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의 트집을 잡아 2만 냥을 빼앗았다

▲ 지난 3월 15일에 열린 고부 봉기 재현 행사 ⓒ 이정환 기자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농민군 천여 명과 함께 말목장터에서 봉기한다. 말목장터를 지켜온 커다란 감나무 밑에서 전봉준은 갑오년 그 길고도 아름다운 싸움의 깃발을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깃발이 올랐던 말목장의 그 감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던 날 그 나무는 '우~~~웅' 하며 길고도 깊은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생전 처음 그런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두려움과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것이 저 깊은 땅 속 농민군들의 원혼이 솟구쳐 오른 것이었든, 시공을 넘어 온 아비 잃은 전봉준의 울음이었든 지금 그 나무는 그곳에 없다. (현재는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이다.)

▲ 이평면사무소 앞 말목장터의 감나무 자리 ⓒ 이정환 기자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 전봉준 장군의 유언시

▲ 이평면사무소 앞 말목장터의 감나무 자리 ⓒ 이정환 기자

※ 취재와 기획에 도움을 주신 <동학컨텐츠연구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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