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다시보는 독일 통일(32)] 독일, 승전국에 의해 분단되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5.27 11:12 | 최종 수정 2019.11.20 14:02 의견 0

그러나 폴란드 국경 문제와 폴란드 정부 문제에 관해서는 전쟁 종결 전부터 이미 소련과 영국, 미국 간에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런던에서 독일과의 전쟁에서 폴란드 군을 지휘하고 동맹국들이 승인했던 미콜라지크(Stanisław Mikołajczyk) 총리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향후 폴란드 국가 건설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그 대신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폴란드 지역에 소련이 지원하는 루블린의 폴란드 민족회의를 폴란드 임시정부로 전환하고 이를 동맹국이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 영토는 두 차례나 적성국에 의해 러시아 침략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소련과 폴란드 간에 우호관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즉, 폴란드 문제가 소련의 안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폴란드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경 문제 역시 얄타협정이나 포츠담협정은 폴란드 동부 국경 문제에 관한 협정 내용 해석을 각각 달리하고 있다. 194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외무장관회의에서 소련 외무장관은 “지금 포츠담에서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얄타에서 커즌 선(Curzon Line) 동쪽의 영토가 소련에 편입된 보상으로 서쪽의 폴란드에 공정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약속을 소련이 인정하면서도, 독일과 폴란드 간의 경계를 잠정적인 것으로 이를 영구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로 해석했다.

이후의 사태 발전은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독일의 분단과 동서대결로 미래의 평화조약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45년 뒤인 1990년 독일통일로 2차대전 평화문제가 최종적으로 종결되었을 때도 결국 현상의 확인에 그치고 말았다. 폴란드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간의 국경은 1945년 5월 8일 그어진 경계선을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이다.

3강국 간 분할에 관한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1945년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고 전승 4강국이 사실상 독일과 베를린을 분할 점령하였다.

독일을 몇 개의 독립된 국가로 분할한다 해도 분권화한 느슨한 연방국가 형태의 독일에서도 전쟁 잠재력 제거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분할에 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였다.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한 프랑스를 분할 관련 위원회에 참여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3강국 간의 이견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독일을 몇 개의 주권국가로 분할하는 경우 1860년대의 통일운동에서 보듯이 독일민족 의식의 고양에 따라 다시 통일 요구로 나올 것이란 전망이었다. 또한 독립된 각국은 경쟁적으로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에 나설 것이기 때문에 재통일되는 독일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모겐소 구상처럼 전승 4강의 간섭 하 탈산업화한 목가적인 느슨한 연방 방안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화로 가는 것을 경험하였듯이 독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경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예상되는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에서 독일의 분할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3강국은 프랑스 임시정부를 포함한 4강국에 의한 사실상의 분할점령으로 나아갔다.

당시 스탈린이 발표했던, 독일을 분할할 의도가 없다는 성명의 배경에 관해서는 명확한 근거자료가 없다. 얄타회담에서 나온 유럽 전후 질서 및 일본과의 전쟁 참여에 관한 소련의 요구를 보면, 이 문제는 대체로 소련의 안전보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련의 입장에서 유럽의 남부까지 이르는 지역이나 이란, 만주 지역 그리고 일본과의 경계가 되는 도서 지역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볼세비키 혁명 후의 국제적 간섭전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의 노선인 1국 사회주의는 이런 관점에서 소련 방어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에서 극동에 이르는 국경지역 밖에는 모두 완충지대를 두고 있었다. 얄타회의의 합의나 이후 실제 소련의 행동은 이런 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독일 분할 점령에 관해서 스탈린의 점령이 아니라는 연설과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성명의 유사점은 매우 흥미롭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