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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19)]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불안함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5.30 11:44 의견 0

너무 행복해서 두려운 순간들이 있다. 연인과 사랑에 빠진 지금이 너무 행복하지만 문득 ‘이 사람이 떠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말이다. 불안은 무료할 정도로 여유로운 주말 오후, 따스한 볕이 드는 창가 침대에 누워 행복을 만끽하던 순간 찾아왔다.

어학원을 다니던 두 달간은 홈스테이도 일단 한 달 계약해놓았고, 경제적으로도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당장은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문득 두 달 뒤에 낯선 땅에서 마주할 미래를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다음은 어디서 살아야 하지'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있는데, 일을 바로 구할 수 있을까'

'비자 기간을 연장하려면 농장을 가야하는데...'

두 달 뒤 내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오겠다고 결심할 때 ‘고생 한 번 직살나게 해보자’던 나의 다짐 안에는 마음고생은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응석을 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내 속사정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모든 것은 내가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은 곧 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와 연결되었다. 부모님의 품 안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포근한 이불을 덮으며 ‘난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낯선 땅에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나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일이 구해지지 않을 때는 고통이 내 목을 졸라매는 느낌이었다.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던져져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금전적인 문제가 생기면 치명상을 입고 세상에서 도태되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한국으로 귀국하는 게 낫지, 부모님께 돈을 받는 것은 끔찍이 싫었다.

수십 개의 이력서를 넣은 끝에 겨우 면접기회를 얻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면접을 치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중에 연락 주겠다’ 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을 연락을 무작정 기다리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저앉았다. 상실감에 실제로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목놓아 힘껏 울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함께 사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눈물 끝의 짭쪼름함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엉엉 우는 대신 목구멍에 걸린 무언가를 토해내듯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몇 번이고 계속 내쉬었다. 숨과 함께 나를 옥죄는 걱정이 날아가기를.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이 날아가기를. 내 눈에 맺힌 슬픔이 날아가기를. 내 앞을 가로막는 좌절이 날아가기를.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눈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뿐이었다.

눈물의 이유는 내 자신이 전부가 아니었다. 문득,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속에서 많은 설움을 누르며 살아와야 했던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내 몸 하나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어린 나를 위해 내가 겪은 것보다 더 힘든 것들을 이 악물고 버티셨을까 그 때마다 이렇게 고통을 토해내듯 숨을 쉬셨을까

한번 덮쳐온 슬픔과 서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혹여 우는 소리가 방문 틈 사이로 새어나갈까 입과 코를 막은 채 무릎에 파묻었지만 소리를 삼켜낼수록 어깨는 들썩였다.

어둠 뒤엔 또 다시 빛. 좌절 뒤엔 다시 희망. 하염없이 눈물이 멈추자 뜨거웠건 목 안이 다시 제 온도를 찾아왔다. 그와 더불어 마음도 한결 편안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살아가나 보다. 은은하게 때로는 격하게 숨을 쉬며 불안과 두려움, 슬픔은 토해내고 희망과 사랑을 들이마시며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

삶을 살아갈수록 소중한 걸 얻을수록 책임감이란 이름으로 삶의 이유가 하나씩 늘어가며 마지못해 살지만 또다시 희망으로 살아가게끔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나 보다.

정말 힘들어 이 세상엔 나 혼자만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을 때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힘 내.', '이또한 지나가리.' 머리로는 알겠지만 마음으로 와 닿지 않는다. 힘이 나야 힘을 내지. 나는 지금 당장 힘든걸.

그럴 땐 백 마디 위로의 말을 듣는 것 보다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어 보는 게 더 좋다. 한 번으로 될 턱이 있나. 수도 없이 그냥 숨 쉬는 기계가 된 양 내쉬고 마쉬고를 반복하기를. 제발 그렇게라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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