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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한일역사(19)] 명량해전의 진실①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승인 2019.06.08 14:25 의견 0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 : 회오리 바다’는 1,760만 명이 본 역대 흥행 1위였다. 고뇌하는 이순신은 대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명량’은 사실과 허구가 혼재된 팩션(팩트+픽션)이다.

더구나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김한민 감독은 배설(1551∼1599) 집안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여 곤욕을 치렀다. 영화에서 배설은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암살을 기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뒤 도망치다가 안위가 쏜 화살에 숨진 인물로 묘사되었다.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 1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가서 군량을 모두 불태우고, 8월18일에 회령포에서 이순신에게 전선을 인계했다. 배설은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8월 30일에 병세가 위중하여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병가를 청하여 이순신의 허락을 받고 전라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랐는데 9월2일에 도망쳤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참조)

이후 배설은 도원수 권율에게 선산(善山)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599년 3월6일에 참수되었다(선조실록 1599년 3월6일).

또 하나 명량해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전선(戰船)이다. ‘명량’ 영화는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고 홍보했다. 그런데 학계의 정설은 ‘13척 대 133척’이다.

영화 ‘명량’처럼 조선수군이 12척의 배로 싸웠다는 근거는 이순신이 1597년 8월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8월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이순신은 선전관 박천봉을 통해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8월 7일에 작성된 것이었는데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수군폐지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그런 선조의 명령에 대해 장계를 올려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항거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전선은 적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왜 13척이 되었나 이순신의 장계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타고 온 배 1척이 추가되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배설이 가져온 배는 10척인데 폐선을 수리하여 12척이 되었고, 김억추의 배가 추가되어 13척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음은 일본의 전선이다. 20세기 초에 나온 일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명량해전에 참가한 일본 전선은 300여 척이다. 또한 <이충무공 전서>의 기본이 되는 <충무공 가승(忠武公家乘)>에는 피난민들이 산 위에 올라 헤아린 일본 전선 수는 300여척이고 해전에 참전한 배는 133척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명량해협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량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울돌목’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항해가 쉽지 않은 협수로(狹水路)였다.

따라서 해남 어란포에 집결한 왜군의 전선은 330여척이었는데, 200여척의 대형전선 아타케부네는 명량에서 전투하기가 어려워 해협 밖에 대기했고 소형선 세키부네로 구성된 133척의 일본 함대가 명량에서 싸운 것이다.

왜군이 소형선으로 싸웠다는 것은 이항복이 선조에게 아뢴 말에도 나온다.

“정유년에 명량에 왜선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가 판옥선을 띄워 해전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선조실록 1600년 6월 15일)

이럼에도 불구하고 10척 또는 12척의 배로 왜선 300척, 330척, 500척과 싸웠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1686년(숙종 14)에 이민서가 지은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에는 “10척의 배로 5백 척의 왜군을 무찔렀다”고 적혀있고, 1951년에 정인보가 지은 온양온천역 광장의 ‘이충무공 사적비’에는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1956년에 이은상이 지은 ‘진도벽파진 전첩비’에도 12척의 배로 3백 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적혀있다.

이는 이순신의 승리를 부풀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이순신의 1597년 9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왜선이 130여척으로, 이긍익이 1776년에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5,6백 척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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