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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36)] 동독과 서독, 분단이 고착화되다②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6.10 10:31 | 최종 수정 2019.11.20 14:03 의견 0

이 비망록이 완성되기도 전에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amann) 내무장관이 반발하여 장관 직에서 물러나 기민련을 탈당한 뒤 독일인민당(DVP)을 창당하였다. 비망록이 공개된 후 사민당은 재무장에 반대하였고, 나치 장교 출신들과 극우세력은 비무장을 국가적 수치라고 보면서도 서독 국군이 외국인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에 반발하였다.

여기에 전쟁 자체에 반대하는 그룹까지 끼어들면서 서독 국내가 시끄러웠다. 결국 비망록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유럽방위공동체조약(European Defence Community Treaty)이 1952년 5월에 서명되었지만 프랑스 의회가 그 비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55년 6월 국방부가 설치되고 지원자로 구성된 독일연방군(Bundeswehr)이 창설되고 1956년에는 징집을 허용하는 기본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서 서방 점령 3개국과 서독 간의 관계 재설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독의 주권을 제한해온 점령조례 체제를 해제하고 서독의 주권을 회복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 5월 26일 서독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반년 동안 협상해 온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과 4강국 간의 관계에 관한 조약'(Vertrag uber die Beziehung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n Drei Machten)이다.

1952년 5월 26일 서명되었지만 효력은 비준서가 기탁된 1955년 5월 5일부터 발생하였다. 이는 유럽의 군사동맹을 목표로 한 ‘유럽방위공동체조약’과 짝이 되어 동시에 발효될 예정이었으나 프랑스 의회가 비준 동의를 거부함으로써 1954년에 체결된 ‘독일 점령체제 종결에 관한 의정서’의 독일조약 효력발생에 관한 규정에 따라 의정서 서명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이 비준서 또는 승인서의 서독정부 기탁일인 1955년 5월 5일 발효된다.

이 조약의 목적은 냉전 구도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여 국제연합 및 나토에 가입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베를린과 전체 독일에 관한 점령 3강국(4강국)의 최종결정권 보유를 인정하고 있다. 소련과 동독 역시 이 흐름에 맞추어 1954년 3월 소련이 다른 주권국가와 동일한 관계를 동독과 수립하겠다는, 즉 동독이 주권국가임을 선언하는 정부 성명서를 발표하고 1955년 9월 2일 소련과 동독은 기본조약(Vertrag uber die Beziehungen zwischen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und der Union der Sozialistischen Sowjetrepubliken)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전문에서 ‘1954년 파리조약(독일 점령체제 종결에 관한 의정서) 체결에 의한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라고 규정하여 서방 3국의 조약에 대응하여 체결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Neues Deutschland)는 이 조약 체결을 보도하면서 ‘우리나라의 서쪽 부분을 나토 군사동맹에 포함시키는 파리조약 체결에 의해 독일 분단은 확증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국제적으로 분단이 확인된 것이다.

이제 독일은 국제적으로 확인된 분단국가 체제로 나아가게 되고, 각기 군대를 보유하면서 자기네 진영의 군사동맹체제에 편입되어 동서 냉전과 해빙에 따라 긴장의 높낮이가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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