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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뭐지?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한국 교회(13)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6.12 11:25 의견 0

토론은 없다

토론은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음을 전제하며, 2명만 있어도 두 가지 생각이 있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협력해서 선’을 이루라는 말씀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갈등이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도 선교에 관한 이견이 있었고(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의 생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서로 다른 생각이 있었기에 토론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공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에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토론문화가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성경을 주로 다루는 목사에게 교회 대소사(大小事)(크게 세 가지인데, 재정권, 인사권, 행정권 등 이다)의 결정권을 모두 위임하니, 토론을 하자는 건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주님의 종’에 대한 도전, 그런데 목사만 주님의 종이고 나머지 성도들은 주님의 종이 아닌가 이미 신약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목사도 하나의 직분으로 적혀있다. 각 직분이 있는 이유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 봉사의 일을 하는 것,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언명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과거에 필자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자신을 교회의 유능한 CEO이자 절대적인 선으로 선전했다. 설교 중에는 얄팍한 경영 지식을 다룬 책들을 소개하고, 자신이 부임하기 전에 수억 원의 빚을 지고 있던 교회를 수억 원의 흑자 재정으로 만들었음을 공공연하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토론은 사탄이 조장하는 것이라 하면서, 토론은 발전과 해결의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분열로 이끄는 길이라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했다.

가끔 목사님과 다른 생각이 있는 집사와 장로가 있어서 토론이라도 하게 되면, 얼마 후에 토론했던 집사와 장로는 교회를 떠났다. 목사님은 종교개혁의 국가이자 선진국인 독일에서 선교사 사역을 하고 왔는데, 선진적인 모습보다는 과거 독일의 나치가 떠오르곤 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토론은 존재했고, 그 역할 또한 중요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토론을 부정하고 회피하며, 상명하달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일수록 담임 목사의 권력은 정상적이지 않을 정도로 비대하고,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지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기구가 교회 내에 없다. 담임 목사들이 비자금을 축적하고, 부자세습을 자행하고, 교회재정을 마음대로 횡령할 수 있는 권한에 감히 도전할 수 있는 개인이나 조직이 부재한 것이다.

영국의 액턴 경은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는 이러한 교회를 파쇼적인 구조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과거 ‘만민평등사상’을 한국에 전해 주고, 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했던 한국 교회는 성장과 함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가장 비민주적인 집단이 돼버렸다.

다시 과거에 다녔던 교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저녁 예배 이전이었는데, 사람 좋기로 소문난 부목사님이 담임 목사님께 결제를 맡기 위해 서류철을 들고 강대상 옆에 서 있었다. 잠시 후 A4 한 장이 허공을 나풀나풀 떠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진 종이를 사람 좋은 부목사님이 황급히 줍고는 쳐다보지도 않는 담임 목사님한테 90도로 허리숙여 인사하고 신속하게 사라졌다. 그 시간에는 꽤 많은 성도가 예배당에 있었는데, 누구도 그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에서의 정답은 하나님이 아니다. 정답은 담임 목사이다. 비판받는 교회들은 대부분 절대화된 담임 목사를 섬기고 있는 곳이다. 토론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 있는 교회에서 양자가 된 성도들은 ‘종’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아들 된 자가 ‘종’의 노예가 된 모습이 바로 현재 한국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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